삶을 채색하는 무엇
고흐의 그림이 인쇄된 마우스패드, 바로크 양식을 카피한 웨딩홀 건물, 피카소가 등장하는 애플 광고, 냉장고 표면을 덮고 있는 몬드리안의 그림 등 우리 생활 속에서 미술작품(혹은 예술가)을 만나는 건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기업들도 살아남기 위해 미술작품을 혹은 예술을 활용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걸까요?
전쟁의 역사건 광기의 역사건 어떤 종류의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면 알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그 대상 자체의 역사만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인데요. 설명이 필요 없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건축, 회화, 조각 등 다양한 형태의 미술작품이 만들어진 당시 사회가 어떤 배경과 구조를 지니고 있었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작품을 의뢰한 주체와 실제 작품을 생산해낸 예술가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또한 매우 중요한데요. 요즘 시대로 비유하자면 클라이언트와 예술가와의 관계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미술작품이라는 결과물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작품의 대한 개별적인 이해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입문서로서의 <서양미술사>가 가진 가치는 무엇일까요? 두꺼운 책 한 권 읽었다고 예술적인 삶이 살아질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주변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시각적인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꼭 미술관에 가서 다양한 예술작품을 정기적으로 봐야 미적 경험이 풍부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예술적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유명하지만 진부하게 느껴지는 문구 다들 한 번씩은 들어보고 읽어보셨을 텐데요. 정말이지 미술에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술 작품에 한하여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큰돈이 오가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부동산, 주식 못지않게 전도유망한(?) 분야는 다름 아닌 현대미술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회적 계급을 알 수 있는 다양한 물건 중에 값비싼 차나 명품보다 더 효과가 큰 것은 바로 미술작품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리고 거기에는 작품을 소유한 대상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숨겨져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명품으로 가득 찬 드레스룸을 가진 사람보다 소박한 환경에서 고가의 그림을 소장한 사람에게 마음속으로 더 높은 점수를 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인데 굳이 <서양미술사>처럼 바로 써먹을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두꺼운 책을 읽어야 하나 그냥 미술 관련 유튜브 몇 개 찾아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각자의 상황에 맞게 취사선택하면 될 문제다 라고 편한 답변을 드리기보다는 조금 느리고 지루하다고 생각되는 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다채로운 배경지식을 쌓아나간다는 건 무채색의 삶에 색을 입히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용적인 이득만을 위한 독서는 결국 막다른 지점에서 통찰력을 발휘하기 힘든 것 같아요.
우리가 불친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이면에는 상당수 무지가 숨어있다는 생각도 하게 했던 책이었네요. 차분하고 친절한 설명으로 페이지 넘기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고 도대체 고흐 얘기는 언제나오나 하고 조바심을 내기도 했던 책 <서양미술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