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밸런스를 지닌 꿀잼 미드
<퀸스 갬빗> 마지막화를 보고 언더독이 승리하는 다소 뻔한 결말이지만 탁월한 균형감각이 느껴지는 시리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갈수록 오리지널 시리즈의 퀄리티가 높아지는 넷플릭스의 2020년 대표작 <퀸스 갬빗>입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하먼은 언더독중의 언더독의 설정을 지닌 인물인데요. 1950년대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어머니마저 잃고 보육원에서 새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여자 아이입니다. 시리즈 초반엔 베스에게 동정심과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조로 진행이 되는데요. 약물 중독에 대한 암시와 천재성에 대한 표현이나 수위가 적절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특정 상황에만 과몰입하지 않도록 하는 연출이 돋보이는 오프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보육원 지하실에서 시작된 베스의 체스에 대한 재능은 입양이 된 이후 각종 대회 참석을 통해 증명되고 확장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는데 단순히 천재 캐릭터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몽타주로 나열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언더독이 겪어야만 하는 어려움과 차별, 난관을 매끄럽고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어요. 갈수록 남녀 갈등과 젠더 감수성의 부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시점에서 눈여겨 볼만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퀸스 갬빗>에 나오는 여성의 모습은 수동적인 역할을 부여받은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요.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를 쇼핑몰에서 마주치는 상황이나 시대 배경에서 느껴지는 한계가 화면을 넘어 시청자에게 닿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거의) 남자로만 이루어진 체스판에서 베스는 성장하고 방황하고 성숙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요. 자연스럽게 남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베스가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모습에 응원을 보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매력적인 외톨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느끼게 만드는 캐릭터가 바로 베스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콘텐츠를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이긴다는 사실 말이죠. 베스도 결국(?) 이깁니다. 그런데 그냥 뻔하게 이기지는 않습니다. 두 번의 뼈아픈 패배를 안긴 상대에게 세 번의 도전 끝에 이깁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고 조력자로서의 남성이 어떻게 이야기 속에 존재해야 하는지 모범답안을 보여줍니다. 감독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자 이렇게 사용하면 됩니다'하고 말이죠. 언더독에 대한 일방적인 동정심과 천재 캐릭터(천재라고 하기엔 노력을 많이 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라는 진부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시리즈의 후반부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점점 베스에게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퀸스 갬빗>의 성공 요인이자 미덕은 억지 설정이 없고 어설픈 떡밥을 뿌리지 않으며 언더독을 일방적인 약자로 묘사하지 않고 기교에 치중하기보다 체스의 중요한 한 수를 두듯 진중하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베스 역의 안야 테일러-조이의 탁월한 연기력과 아름다움 그리고 패션은 거들 뿐이랄까요?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극적인 연출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듯 보이는 감독의 담백한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체스를 1도 몰라도 전혀 상관없는 밸런스가 탁월한 꿀잼 미드 <퀸스 갬빗>아직 안 보신 분들이 계시다면 시간 여유되실 때 한번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은 작품입니다. 이유는 재미있는 작품들이 그러하듯 한 번 시작하면 멈추기가 힘들기 때문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