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영화의 원작이 되는 책은 읽지 않았음을 미리 밝히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뒤늦게 영화를 보고 여러 가지 리뷰, 온라인상의 반응을 살펴보았는데 영화의 도대체 무엇이 남녀의 갈등을 조장하는 영화라는 건지 정말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영화는 그저 평범한 82년생 여자가 사는 현실을 보여줄 뿐이었다.
결혼을 안 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수많은 문제를 우리는 얼마나 체감하며 사는 걸까요? 결혼을 통해 맺어진 관계로 생겨난 트라우마, 우울감, 자존감 상실 등 결혼이라는 제도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더 멍들어가고 있다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어요. 사회생활에서 마주치는 관계들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는 동성 친구와 육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친구는 자기 아이인데 육아를 도와준다는 표현을 쓰더군요.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돌봄에 있어 타자에게 선의를 베푼다는 뉘앙스의 도와준다는 표현이 적절한 단어인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인데요. 친구는 맞벌이하는 상황이었고 설령 외벌이했더라도 자기 자식의 육아를 도와준다는 표현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거든요. 단순한 단어 선택의 견해차라고 봤다기보다 자신은 육아의 주체가 아니라고 생각한 기저에 깔린 의식에 더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엄마가 육아의 주체라는 의식, 이 고정된 관념이 바뀌지 않는 이상 2200년도가 오더라도 육아의 주체는 항상 한 사람의 몫으로 남겨질 것 같아요.
차별을 가하는(설령 모르고 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약자가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에서 우리는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강자의 의식 구조가 변하지 않으면 차별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죠. 강자의 모순 속에서 약자가 힘겹게 자신의 삶을 지탱해 나가는 모습들은 끊임없이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하지만 곧 잊어버리고 다시 차별의 일상을 살아가게 되는데요.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걸까요?
한계에 다다른 약자들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고 맙니다. 더는 어떤 상황이나 대상을 견딜 수 없게 되면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무언가를 선택하게 되는데(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도 포함해서) 지영은 글쓰기를 선택합니다. 국문과 출신이 아니었더라도 글쓰기는 지영이 선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자기표현의 방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