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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넼 Mar 17. 2021

과학이 아닌 미술로 영화'테넷'보기

'고야'와'아레포','사투르누스'와 '사토르'

  과알못인 저는 테넷을 보면서 인버전, 엔트로피와 같은 물리학 개념보다 더 관심이 갔던 부분이 엉뚱하게도 고야의 작품을 베낀 화가 ‘아레포’였습니다. 이름만 거론될 뿐 작품 속에 등장한 적도 없는 인물이지만, 극 중에서 ‘사토르’가 ‘캣’을 구속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장치로 쓰인 게 바로 그의 작품이었죠.


  영화를 이틀 동안 연달아 보면서 그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피카소나 고흐같이 좀 더 대중적인 화가가 아닌 고야였을까?’라는 것이죠. 그런 의문을 가지고 며칠을 보내다 문득 ‘테넷’과 ‘고야’ 사이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연관성을 발견했습니다.


  작품 안에서 등장하진 않아 감독이 의도했다고는 볼 수는 없지만 고야의 그림 중에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1820~1824년경 그려졌다고 알려진 작품으로, 우리가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감상에 앞서 고대의 풍습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다들 아시다시피 고대에는 신이 곧 권력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제(주술사)는 신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대행자, 더 나아가서 신 자체였는데요. 이 사제도 결국은 인간이기에 늙고 병들겠죠? 하지만 신은 그럴 수 없으며, 사람들은 계속 신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꽤나 많은 지역에서 사제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신성을 이어받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반대로 아버지가 젊은 아들을 이겨서 죽인다면 아직 신으로서 건제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겠죠. 생존과 종교적 의식을 위해, 또한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부자간의 살인행위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배경 지식을 알아보았으니 이제 그림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들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로마의  사투르누스는 자신의 아들을 잡아먹습니다. 어떠신가요? 기괴하기만 했던 그림이 조금은 이해가 되시나요? 또한 이 작품은 신화를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신의 격노, 젊은 세대와 나이  세대의 갈등, 혹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간으로서의 사투르누스를 보여준다고 평가받기도 합니다자 그럼 이 고야의 작품을 통해 ‘테넷’을 살펴보면 어떨까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테넷(2020)'


  테넷에 등장하는 갈등들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 현세대로 인해 생존을 위협받는 미래 세대가 다시 현세대의 생존을 위협합니다. 때문에 현재를 지키려는 단체인 ‘테넷’과 미래 세력 간의 갈등이 그려지죠. 두 번째는 ‘사토르’가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생존과 지위를 위해 아들의 미래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이를 알게 된 '캣'이 자신과 아들의 생존을 위해 사토르와 갈등합니다. 첫 번째 갈등은 세대가, 두 번째는 개인이 사투르누스로서의 역할을 하는 거죠.


  개인인 사토르에 좀 더 집중해 보자면 그는 미래로부터 기술력(과거에 신성이었던 것)을 이양받은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또한 이름인 'SATOR'의 라틴어 뜻만 봐도 경작자, 아버지, 창시자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극 중에서도 이러한 아버지로서의 모습과 권위자로서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기도 하죠. 마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의 모습처럼요.


'사투르누스'와 '사토르'는 이름뿐 아니라 행동과 그 동기까지 닮아있다.


  이렇게 영화는 거시적으로 보면 먼 자식 세대가 생존을 위해 부모 세대를 공격하고, 미시적으로 보면 사토르가 현재를 위해 아들의 미래를 공격하는 형상입니다. 두 가지 상반되는 것 같은 갈등이 동시에 존재하죠. 마치 순행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듯 말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고야를 선택한 것인지 저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렇듯 영화 ‘테넷’은 사투르누스(현재)가 생존을 위해 아들(미래)을 잡아먹는 이 작품과 상당히 닮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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