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그리고 '설국열차'
여러분은 거짓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거짓말은 나쁜 것인가요, 아니면 좋은 것인가요? 물론 타인을 속이고 이득을 취하는 행위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지양되어야 하는 비도덕적인 행위이겠지만, 과거 그리스의 소크라테스가 에우튀데모스에게 했던 “친구가 몹시 우울해 자살할 것 같을 때 당신이 친구의 칼을 훔친다면 그것은 남을 속이는 행위이지만 도덕적인 행위가 아닌가?”라는 질문처럼, 선의가 담긴 거짓말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이 아닌 인류라는 좀 더 거시적인 관점의 거짓말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 시대의 대표 민머리 석학인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거짓말이야말로 현생 인류인 사피엔스가 생존을 넘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도록 만든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종교, 법, 국가라는 허구를 생산해서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유발 하라리 이전에 이미 18세기, 장 자크 루소에 의해 주장된 내용인데요. 인간은 자연권인 생명, 자유, 재산을 위협하는 환경과 다른 집단 등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구성원들의 합의를 통해 국가라는 조직을 성립시켰다는 게 여러분도 다들 아시는 ‘사회계약론’에서 루소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걸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데요. 농업혁명으로 정착생활을 하고, 인구가 증가하게 되면서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또 많은 인구가 함께 살기 위해 ‘상상의 질서’를 만들게 되는데, 바로 국가, 종교, 법, 화폐 등입니다. 예를 들어 국가라는 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화폐는 종이 혹은 금속 물체일 뿐이죠. 심지어 지금은 데이터상의 숫자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상의 질서'가 제 기능을 하려면 구성원 간의 약속, 즉 ‘이건 국가고, 저건 돈이야’라는 합의가 필요하겠죠. 또한, 이를 신봉하는 집단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끊임없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어떠한 사회를 국가라고 믿고 종이를 돈이라고 믿기 위한 과정 말이죠. 그리고 이 질서가 견고해질수록 사회는 계급화된다고 주장하는데요,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변질되기도 합니다. 왕권신수설처럼 생존이 아닌 지배자들의 통치 수단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이러한 인류의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거짓말, 상상의 질서를 작품 안에서 아주 잘 그려낸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2013년도 작품, ‘설국열차’입니다.
설국열차는 기상 이변으로 인해 인류가 생존할 수 없는 혹독한 빙하기를 배경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끝없이 궤도를 달리는 열차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립니다. 그리고 이 열차는 머리칸부터 꼬리칸까지 철저하게 계급화되어있죠. 정당하게 표를 산 앞쪽칸의 사람들은 호화로운 객실에서 살며 심지어는 술과 마약까지 즐기지만, 생존을 위해 열차에 무임승차한 꼬리칸의 사람들은 17년 동안 빈민굴 속에서 머리칸의 탄압을 받으며 겨우 목숨만 연명하고 살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꼬리칸을 해방시키기 위해 폭동을 일으키고, 열차의 제작자이자 최고 권력자인 윌포드가 있는 머리칸으로 향하기 시작하면서 열차의 진실을 하나씩 알게 됩니다.
설국열차에서 기차는 생존을 위해 존재하고 그 안에 계급과 질서가 있는 하나의 국가입니다. 열차라는 실존하는 물체가 있긴 하지만 그 안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허구로 가득 차 있죠. 예를 들어 총알이라던지, 건강검진이라던지 단백질 바, 심지어는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꼬리칸의 폭동까지 크고 작은 거짓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거짓을 대하는 태도도 제각각이죠. 진실을 마주하고 미쳐서 기차가 돌아가기 위한 부품으로써 사는 사람과 진실에 대해 눈을 가리고 얼굴을 가린 채, 주관을 지우고 맹목적으로 권력을 따르며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그 질서가 진리인양 신앙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으며 아이들은 세뇌 수준의 교육을 받습니다. 질서를 등에 업고 권력을 얻는 사람도 더러 존재하죠.
그리고 작품의 중심에 네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길리엄은 혼돈이었던 초기 꼬리칸에서 자신의 팔과 다리를 희생해 작은 평화를 이뤄낸 꼬리칸의 지도자입니다. 공존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대단한 인물이지만, 생존을 위해 균형이 필요하다는 윌포드의 말에 설득되어 주기적인 폭동을 일으켜 열차의 인구를 감소시키는 인물이기도 하죠. 설득되었다고 표현한 것은 커티스에게 윌포드를 만나게 되면 대화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모습을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만, 그 대사는 자신의 만행을 커티스가 알게 될까 봐 겁낸 것으로도 보이기도 합니다.
열차의 주인인 윌포드는 생존을 위해선 철저한 관리를 통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믿는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생산물과 인구를 철저하게 제한하죠. 어떤 면에서 윌포드의 이러한 사상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되긴 합니다만, 그 방식이 굉장히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입니다. 밖의 눈이 녹고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생산물을 늘려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질서와 균형이라는 그럴듯한 거짓말로 자신의 권력과 욕망을 채우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노후된 열차에서 인간을 부품 취급하며 희생시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후되고 변질된 열차라는 체제에 맞서는 두 인물, 커티스와 남궁민수 나타납니다.
커티스는 열차의 진실을 향해 가는 사람입니다. 꼬리칸에서 머리칸으로 갈수록 단백질 바의 재료부터 시작해서 앞칸의 생활, 스테이크의 맛과 말미에는 윌포드와 커티스의 이해관계까지, 크고 작은 열차의 진실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작품 안에서 커티스의 여정은 거짓된 질서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어두운 꼬리칸에서 나와 빛을 마주하듯, 점점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죠. 수많은 희생을 통해 마침내 윌포드 앞에 선 커티스는 길리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윌포드와 대화를 하게 되고, 열차의 지도자가 되라는 윌포드의 말에 흔들리기까지 합니다. 사실 커티스가 갈등하는 것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커티스의 투쟁은 결국 체제 안에서 자신의 권리와 지위를 위한 투쟁이었기 때문이죠. 열차는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 유지하려면 타인을 희생시켜야 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체제 자체를 깨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남궁 민수입니다.
남궁민수는 열차의 보안담당자로 커티스의 투쟁에 동참하지만, 투쟁의 대상이 다릅니다. 커티스의 투쟁이 체제 안에서 자신의 권리와 지위를 위한 투쟁이었다면 남궁민수는 열차의 질서, 즉 상상의 질서이자 허구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을 갖고, 그것을 깨기 위해 투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7인의 반란에서의 에스키모 여자와 같은 무모한 행동이 아닌, 철저한 근거를 갖고 있죠. 매년 눈의 높이를 가늠해 눈이 녹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창밖으로 북극곰을 보고 생명이 살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이것은 열차의 앞칸만을 바라보는 커티스와 대조되기도 합니다. 시선이 앞을 향하는 것이 아닌 옆, 즉 닫힌 세계의 밖을 향하고 있는 것이죠. 남궁 민수는 열차의 앞을 향한 문을 열고자 하는 커티스와 달리 근본적인 해결, 즉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자 합니다. 커티스는 이러한 남궁 민수를 보고 미쳤다고 생각하지만, 열차의 근본적인 진실을 마주하고 결국 그를 따르게 됩니다. “노후된 열차는 애초에 꼬리칸이던 머리칸이던 아이를 잡아먹는 곳”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리고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고 열차를 멈추며 이 영화는 끝이 납니다.
어쩌면 인류는 생존을 위해 외부로부터 보호할 문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환경이 변하면서 세계도 변하고, 문의 내부는 변질되기도 하죠.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비극은 생존을 위해 형성된 집단의 변질된 생존 욕구 때문이니깐요. 제국주의가 그렇고 노예제도나 민족 간 학살이 그러하죠. 결국 문이 열려야 할 시기는 옵니다. 프랑스 시민혁명이 그랬고 루터의 종교개혁도 닫힌고 고인 체제의 문을 연 것이죠. 우리에게도 아직 극복해야 할 갈등과 구시대적인 관습, 관례가 많이 남아 있지만 또 새로운 질서로 향하는 문이 열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도 열지 않아 그것이 문이라는 것도 잊었을 수 있지만, 우리 주변에 쌓인 눈은 이미 녹을 준비가 된 눈일 수도 있으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