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 아신전'의 공리주의
여러분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기준이 있으신가요? 인지하고 있던지 그렇지 못하던지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갖고 살아갑니다만 그 기준이 모든 상황에 부합하는 절대 가치인지는 분명 생각해보아야 하겠지요. 이렇듯 한 사람의 선택의 기준조차 명확하게 정답을 가릴 수 없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얼마나 많은 기준이 있으며, 그 답을 찾기는 또 얼마나 어려울까요? 아마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의 기준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지성인들이 이러한 기준에 대해 고민해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방법론들이 제시되어 왔지요. 오늘은 그중에서도 ‘공리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공리주의’란 가치 판단의 기준을 ‘공리성’에 두는 사상입니다. 즉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그 행위가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늘리는데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1789년 발표한 『도덕 및 입법 원리의 서론』에서 공리주의의 핵심 원리들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면서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주장한 공리주의 원리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양적 공리주의’입니다. 다수의 행복이 소수의 불행보다 크므로, 어떤 행위가 소수를 희생해 다수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 행위에 소수의 불행이 있다고 하더라도 옳다는 것이죠.
그러나 벤담의 제자이자 친구, 제임스 밀(James Mill)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이러한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새로운 원리를 제시합니다. 바로 ‘질적 공리주의’이지요. 여기서 밀은 쾌락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소수를 희생시켜 얻는 다수의 행복은 인류애를 무시한 질이 낮은 행복이며, 희생된 소수의 불행이 다수의 행복보다 크기에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두 주장 모두 명확하고, 언뜻 보기에는 쉽게 정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미 마음이 가는 주장이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이를 대입해 보아도 우리는 같은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오늘은 공리주의를 통해 영화 ‘킹덤 : 아신전’을 살펴보겠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프리퀄인 아신전에는 앞서 언급한 두 공리주의의 모습이 녹아있습니다. 그리고 두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벤담과 밀처럼 두 인물이 있죠. 바로 킹덤 시즌 2에서 인상 깊은 활약을 하였던 민치록과 주인공 아신입니다.
먼저 민치록의 모습에서 제레미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민치록은 킹덤 시즌 2에서 자신의 정의를 위해서라면 목숨 조차 아끼지 않는 인물로 그려지기도 했는데요, 아신전에서의 모습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왜란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자신의 조국 조선 땅에 호전적인 여진족 '파저위'와의 전운이 감돌고, 조범일의 안일한 행동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자 이를 막기 위해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인 성저 야인들을 희생시킵니다. 이러한 모습이 혜원 조 씨 가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조국을 위해서라는 것은 조범일을 대하는 그의 태도나 중후반부 밝혀지는 그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죠. 이는 마치 조선이라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성저 야인이라는 소수의 불행을 감수하는 양적 공리주의의 모습과도 겹쳐 보입니다. 더 나아가 아신을 거둔 후에도 파저위에게 복수해달라는 아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아닌, 아신을 밀정으로 이용하며 파저위에 대한 정보를 얻는 모습이나, 자신의 병사들이 아신에게 행하는 수많은 부조리에 대해서도 침묵하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민치록에겐 아신의 아버지이던, 성저 야인 부락이던, 아신이든 간에 다수인 조선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소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신을 통해 볼 수 있는 질적 공리주의입니다. 주인공 아신을 있게 한 것은 어린 시절 겪은 가족과 부락의 몰살에 대한 복수심입니다. 아신이 겪은 너무나 큰 불행은 현재를 사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만약 정말 쾌락과 불행에 대한 계량이 가능하다면 아신의 불행은 매우 큰 양이될 정도로 말이지요. 조선이 파저위와 전쟁을 치러서라도 갚고 싶을 정도로, 민치록 밑에서 성장하면서 겪는 불행들도 묵묵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십여 년 만에 만나게 된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알게 된 그날의 진실에 그녀가 당긴 복수의 활시위가 향해야 할 곳이 확장됩니다. 파저위 뿐만 아니라 조선까지 말이죠. 결국 그녀는 어린 시절 알게 된 생사초의 비밀을 이용해 민치록의 병사들을 생사역으로 만들고, 몰살시킵니다. 자신과 부락의 복수를 위해 전쟁을 부탁하는 모습이나 조선의 병사들을 몰살시키는 모습은 소수의 불행이 다수의 행복보다 질적으로 크다면 정의롭지 못하다는 질적 공리주의처럼 보입니다. 더 나아가 조선에 생사초를 퍼뜨리는 행동이나, 자신의 부락 사람들을 모두 생사역으로 부활시킨 것 또한 아신이라는 한 사람의 불행의 크기가 다수의 불행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어떠신가요? 물론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더 마음이 가는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모두 보았을 때 저는 두 모습에서 공감과 부조리를 모두 느끼며, 무엇이 옳다고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만이 무조건 옳다 생각하며 판단을 멈추고 자신의 이익과 쾌락만을 쫓는 자세야말로 이성을 잃고 피와 인육만을 탐하는 생사역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