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예림 Jan 18. 2022

매트릭스 4, 존재를 보는 사랑

당신이 스스로를 확신하지 못할 때에도 나는 그대를 확신할 것이다. 

매트릭스 4를 봤다.
전작까지의 별점에 비하면 충격적으로 낮은 별점이었던 매트릭스는 별점과 관계없이 나에겐 크고 깊은 깨달음을 줬다. 잊기 전에, 리뷰를 쓰기로 결심하고 며칠을 묵혀두었다가 쓰는 게으르지만 감동을 차곡차곡 남겨보기로 했다. 


스포가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 




#모든 것을 가진 삶은 행복한 삶인가 
 매트릭스 3 이후 18년이 지나버린 초로의 네오는 함께 울고 웃었던 과거를 꿈속의 기억이라 믿고 다시 토머스 앤더슨의 삶을 살고 있었다. 토머스 앤더슨은 매트릭스 1,2,3의 기억을 게임으로 구현하여 전 세계의 유저를 열광시킨, 천재 게임 디자이너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있다. 아쉬움 없는 재력에, 명성과 원하는 것을 현실에 구현하고, 그 능력에 열광적으로 반응할 게임 유저도 있다. 그야말로 걱정 없는 삶이다. 매트릭스 1에서 스테이크의 맛을 잊지 못해 파란 약(기계가 구현한 가상현실 속의 삶)을 선택하는 삶의 은유를 다시 재현하듯, 토머스 앤더슨은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뉴욕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최고급 사무실에서 최고급 컴퓨터와 최신 사양의 컴퓨터 등 업무시스템이 구비된 곳에서 일을 한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스테이크를 비롯한 산해진미를 맛본다. 그러나 그는 어딘지 불안하고, 헛헛하다. 더 바랄 것 없는 삶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고, 거울을 바라보며 거울 속 다른 세상의 차원 이동을 시도해보기도 한다. 무엇보다 거울 속의 자신을 낯설어한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깨달음은 결핍으로부터 촉발된다. 결핍은 가난에서 오기도 하지만 풍요에서 오기도 한다. 본질적으로 어떤 환경이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면 존재는 가난하게 마련이다. 자꾸만 꿈속 어떤 장면에서의 네오의 삶을 떠올리는 토머스 앤더슨은 게임으로 꿈속의 삶을 구현해 그것이 허상임을, 자신이 만들어 낸 것임을 확정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 낸 세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받아들일 많은 장치들을 마련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꿈과 현실 속에서 헤맨다. 물질적 풍요와 관계없이, 내면의 가난함은 사람을 방황하게 한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고, 내면의 자아를 찾는 깨달음이 있기 전까지. 



#심리상담사(애널리스트)의 폭력, "다 그래 인마" 
 운동심리상담사로 일하며 나름대로 상담이자 코칭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영화 속 애널리스트의 상담은 진심으로 충격적이었다. 토머스 앤더슨은 자신이 게임 속에서 구현한 가상현실과 실제의 삶을 헷갈리는 자기 자신의 방황이 괴로워 심리상담사를 찾는다. 심리상담사와 토머스의 상담은 상당히 전형적이다. 


토머스 앤더슨은 상당히 진지하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설명하고, 상담사는 그 일을 함께 진지한 태도로 경청한다. 그러고서 현실 속에서 그가 그 꿈을 꿀 수밖에 없도록 암시가 된 자극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장의 압박이 당신에게 영향을 줬고, 현실에서의 불만이 함께 어우러져 그러한 정신착란 증상을 불러일으키는 거라고.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거다. 당신은 그런 능력으로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예술적 창조(게임 개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고 말하는 상담사의 말은 내담자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것 같지만, 사실 내담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면의 소리를 일축하고(그것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각성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저 지금의 삶을 잘 살아낼 수 있도록 버티고 견디게 하는 인지적 해석을 해 주고 있다. 사실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상담의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는데, 현실 속의 삶을 살아내는 것은 내담자들 본인의 몫이기 때문에, 현실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석의 틀을 달리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내담자가 받아들이는 현실에 대한 해석을 객관적 현실로 해석해 습관화된 감정이나 사고패턴의 고리를 끊어내고, 현상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자기 방어가 아닌, 적절한 반응이 이끌어 나오도록 돕는 상담기법을 인지 정서 행동치료(Rational-Emotive Behavior Therapy; REBT)라고 하기도 한다. 보통은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자신, 타인, 환경이나 조건에 대한 편견, 고정관념 등과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자동 사고와 감정들을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바꿔주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러나 애널리스트는 네오로 각성하려는 그의 내면의 소리를 그저 환상이자 꿈으로, 그가 현실을 보다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묶어놓는 매트릭스 속 덫의 역할을 한다. 


 상담자가 내담자를 문제 해결의 주체로서 바라보며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존중감으로 바라보고, 내담자의 내면이 보는 꿈속 잔상에서 중요한 잠재의식 속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도록 경청하는 태도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상담자는 내담자가 그저 현실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히게 될 수도 있다. 상담이나 코칭은 상대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만나는 누군가에게 애널리스트의 태도로(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되는 지점이다. 




#네오와 스미스 요원, 네오와 토머스 앤더슨 

 네오와 토머스 앤더슨은 영화 속에서는 동일인물로, 네오는 각성 후(내면 자아가 깨어나고 육체적 능력을 개방시킨 상태)로, 토머스 앤더슨은 각성 전(내면 자아를 깨닫지 못해 반복된 삶을 의미 없이 살아가는 상태)으로 그려진다. 사실 네오든 토머스든 삶 속에서 이겨내야 할 숙제들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네오는 숙제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능동적으로, 혹은 직관적으로 찾는 반면, 토머스는 삶에서 주어진 숙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늘 고민하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삶을 살아간다. 

 어쩌면 각성한다고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는 아닐 수도 있다. 매트릭스 속에서는 먹고사니즘과 관계, 칠정 오욕에 대해서만 걱정하면 되었는데, 각성 후에는 온 우주를 구해야 한다. 공중을 휙휙 날아다니고, 가공할 만한 힘을 쓸 수 있고, 자신을 조종하고자 하는 세력을 응징하고 저항할 수 있지만, 능력을 지닌 자는 세상에는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신의 지닌 책임감의 그릇 크기와 관계없이 구세주가 된다. 세상이 구세주로 자신을 보면, 어쩔 수 없이 구세주의 역할을 하기는 해야 한다. 네오는 다른 슈퍼히어로물 영화과 달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감이나 책임의식은 그렇게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진짜 현실세계로 안내하는 모피어스와 벅스, 현실 세계 속 인간 공동체를 이끄는 수장 니오베는 네오에게 기계와 대적하는 (승산은 낮은) 엄혹한 현실에서 한 줄기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어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네오는 그와 관계없이 사랑하는 트리니티를 현실세계로 데려올 방법에만 진심이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희생될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자신을 믿고 따르기로 한 그들의 선택에 어떠한 의무감도 표현하지 않은 채 트리니티와 함께여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를 따르는데 열중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물론, 네오가 트리니티를 만나면 둘의 존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해진다. 그러나 구세주로서의 네오를 바라보는 벅스 이하 팔로워들은 네오만큼 트리니티 구출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를 따른다. 그것은 사명감이 투철하면서도 유능한 리더를 따르는 팔로워십이라기보다, 네오의 확신이 보내는 파장에 감응했기 때문이다. 


 네오와 토머스 앤더슨이 동일인물이라면 네오와 스미스 요원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인물이다. 기계가 만든 가상현실 속에서 모든 인간이 가상현실에 세뇌되어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끔씩 네오와 같이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틈을 귀신같이 감지하고, 혹은 내면의 영성으로 각성하는 남다른 인물들이 등장한다. 기계들에겐 프로그램 내부에 버그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기계들은 이런 각 성인들이 가상현실에 영향을 미처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데 차질이 빚어지지 않도록, 발생한 버그를 디버깅할 장치를 마련해 둔다. 그것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요원' 들이다. 그러니까, 네오가 각성하는 순간, 네오를 디버깅할 스미스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네오가 없다면, 스미스 역시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서로 적대적 관계지만 매트릭스 속에서는 운명공동체이기도 하다. 매트릭스 4에서는 늘 네오를 위협하고 죽이려 들었던 스미스가 처음으로 네오를 돕는 기이한 행동을 보인다. 사실 영화 속에서 애널리스트가 그간의 매트릭스 시리즈 중 역대 최악으로 사람의 감정과 정서까지 건드리며 극악한 세계관을 설계했기 때문에, 스미스도 화날(?)만 했을지 모르겠다. 네오와 스미스는 필연적인 적수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 속에서 진정한 현실을 사는 내면의 존재는 늘 매트릭스와 같은 물질 세상의 안개가 만들어내는 자아(ego)에 가려져 있다. 돈을 바라고, 타인에게서 받는 사랑과 신뢰를 바라고, 사회적 지위를 바라고, 영향력을 바라는 자아는 사실 자신에게 그러한 것들이 그다지 필요 없으며,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진짜 현실을 잊게 한다. 스미스는 어찌 보면 존재가 각성하지 못하도록 공포심을 주고, 현실을 더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하는 자아(ego)에도 비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아 역시 조금씩 내면이 성장할수록 (각성하지 못하더라도 내면은 성장한다) 함께 성장해간다. 성숙한 자아는 내면의 성장과 더불어 각성을 돕는 촉진제가 될 수도 있다. 또한 그의 마지막 대사 "넌 누구나 될 수  있지만, 난 누구도 될 수 있어."라는 대사 역시 기억할 대사다. 누구든 각성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구세주에 필적하는 능력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각성하고자 하는 존재에게 각성을 막는 자는 가까운 사람이 될 수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누군가가 될 수도, 사회적 시스템이나 제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확신, 그리고 사랑

 매트릭스 속 세계에서 트리니티는 티파니라는 이름으로 산다. 아이 셋의 엄마이자 잘생기고 나름 카리스마도 있는(토머스가 티파니에게 인사하자 경고의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남편의 아내이기도 하다. 살뜰하게 아이들을 돌보는 엄마이면서도 바이크를 고칠 수도 있는 걸 크러쉬 매력 뿜뿜한 주부다. 토머스와 조우한 티파니는 매트릭스 속 세계에서 네오와 트리니티로서의 관계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서로 남다른 인연임을 감지한다. 매트릭스 속 세계의 애널리스트는 기계들의 동력으로 사용되는 인간이 발열 에너지를 더욱 효율적(?)으로 내게 할 수 있도록 아슬아슬하게 티파니와 토머스의 간격을 조율한다. 둘이 이어지면 둘의 존재가 강력해지고 각성으로 이어지는, 애널리스트로서는 골치 아픈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둘이 오다가다 마주치며 애달프게 서로를 그리워하는 적정거리를 설정해두면 에너지 생산이 촉진되더라는 영화 속 애널리스트의 설명. 

(이런 감정 작용으로 생체에너지가 급발진되고, 그 에너지를 기계가 사용하고 있다니 왜 불같은 사랑을 하게 되면 살도 빠지고 에너지가 확확 도는지, 왜 드라마는 막장이 최고 인기인지 알 수 있게 되는 대목이다) 

이제는 하다 하다 인간의 감정까지 떡 주무르듯 주물러가며 각성을 막는 잔인한 기계들. 심지어 여자 주인공에게 남편과 아이들의 설정이라니, 영화 속에서는 아주 잠시만 다뤘지만, 운명의 상대 네오를 선택하려면 트리니티는 매트릭스 속 남편과 아이를(무려 셋이나) 버려야 한다. 역할과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진정한 사랑의 크기를 극단적으로 그려놓은 설정이다. 나는 영화를 보며 '주인공이 네오와 트리니티인데, 당연히 트리니티는 네오를 선택하겠지!' 하는 예측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엄마로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란 얼마나 치열하고 어려운 일인가를 곱씹어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란 숭고하지만,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트리니티를 매트릭스로 데려오기 위한 작전에서 요원 한 명이 네오에게 묻는다. 

"만일, 트리니티가 매트릭스 속에서 행복하다면, 그래도 데려올 건가요?" 

네오는 '나도 매트릭스 속에서 완벽하게 적응해 있었다.'며 그럼에도 트리니티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티파니는 처음에는 지금의 삶이 좋다며 네오를 따라나서는 것을 포기했지만, 내면의 갈망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다. 매트릭스 1,2,3에서 트리니티는 네오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캐릭터였다. 처음 각성한 네오가 구세주임을 네오보다 먼저 믿은 것도 트리니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네오가 트리니티를 신뢰해야 할 시점이다. 네오는 애널리스트의 대결에서, 트리니티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매트릭스 속에서 살겠다며(따라온 동료들로서는 이게 뭔가 싶은 제안이었을 것이다) 애널리스트에게 협상을 시도한다. 그리고 트리니티는 끝내 네오를 선택한다. 트리니티가 네오를 선택한 건, 남편과 아이 셋보다 나은 삶을 비교해 본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네오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역시 사랑이다. 결혼했기 때문에, 아이들의 엄마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가 아닌, 당신과 나이기 때문에. 트리니티이고, 네오이기 때문에. 


트리니티가 네오를 선택하고서도 애널리스트는 둘을 곱게 놓아주지 못하고 이들을 제거하기 위한 추격전을 벌인다. 높은 건물 꼭대기까지 도망가다 수세에 몰린 네오와 트리니티는 옥상 발코니 위에 선다. 전작에서 이미 하늘을 날았던 네오다. 그러나 그는 오랜 매트리스 속 생활의 후유증으로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다. 날았던 기억은 있으나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확신하진 못한다. 그들에겐 역시, 선택지가 없다. 확신이 있건 없건 뛰어내려야만 하는 순간에 네오는 중력의 영향을 받지만 트리니티는 네오의 손을 잡고 날아오른다. 네오는 자신에 대한 확신도, 트리니티에 대한 신뢰도 부족했지만 선택해야만 하는 숙명을 받아들였다(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트리니티는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의심 없이 확신했다. 네오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트리니티는 종교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즉, 신이라는 뜻이다. 공교롭게도 각성한 네오의 연인은 '신'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해도 존재를 만든 초월적 존재, 즉 신은 그를 변함없이 신뢰한다.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믿는 것이다. 신이 자신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깊이 깨닫는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네오와 트리니티의 결합은 신인합일을 의미한다. 키스와 로맨스, 정사가 아니더라도 매트릭스에서 보여주는 네오와 트리니티의 사랑은 어떤 확신의 증표가 필요 없는, 무조건적인 신뢰다. 관계에 대한 신뢰가 아닌, 존재에 대한 신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같은 관계가 세속의 사랑과 무관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존재들은 모두 귀함에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발견하고, 끝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다른 존재와 다른 사랑의 감응을 하기 때문이다. 서로 감응을 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은 끝내 이어질 수 없다. 트리니티와 네오가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감응하고 있다 하더라도, 옥상에서 뛰어내릴 때 손을 잡지 않았다면, 그저 믿고 있기만 했다면 둘은 함께 날아오를 수 없었을 테니까. 




#결국 삶은 반복된다. 선택할 수 있다 믿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뿐이다. 

 매트릭스 4에서 봤던 모피어스의 명대사 중 하나는 "선택도 사실 일루전"이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해야 할 것들을 하기 위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것이다. 결국은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해야만 하는 일은 해야 한다. 네오는 현실의 삶을 선택해야만 하고, 그것은 상황이나 환경이 만들어 놓은 루트가 아닌 존재의 필연이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못하면 할 수 있을 때까지 괴롭다. 어떻게 보면, 불가에서 말하는 '카르마'라는 말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면의 존재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자아는 끊임없이 방황한다. 방황하는 과정에서 벗어나 각성하기 위해서는 자아 역시 성숙해야 한다. 자아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하고, 어찌 보면 그 과정은 성숙을 위한 필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각성하고자 하는 존재는 반드시 '과정'을 겪는다. 한 번에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불확실에 불안해하는 자아가 내면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으려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을 하나씩 접하며 그것들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어난 일들은 모두 필연이고, 그로 하여금 우리는 배우고 각성한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우리는 여러 감정을 느끼며 저항한다. 받아들이기 너무나도 힘든 일들은 온몸에 힘을 주고 할 수 있는 한 미루거나 회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일이 벌어진 것은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원하고 있고, 그에 다가가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원하는 일로 하여금 파생된 일이라는,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 과정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면의 성숙을 원하는 자에게 내면의 성숙을 위한 성장통이 수반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진실한 사랑을 찾는 자에게는 사랑을 시험하는 갖가지 일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모든 일들을 거치고 나면, 비로소 원하는 것을 이루고 얻을 만큼의 그릇이 되는 것이다. 




#각성하라, 당신은 충분히 힘이 세다. 사랑과 함께라면 더욱 그렇다.   

 이번 계기로 매트릭스 1,2,3편을 다시 봤다. 어릴 적 (중학교 때 매트릭스 1이 나왔다. 뭘 알긴 하고 봤던 거냐) 매트릭스를 보았을 때 혹했던 화려한 액션과 배우들의 카리스마, 종교와 철학, IT적, 인문학적 영역이 총망라된 시공간의 설계와 명대사들의 향연은 매트릭스 4에서 만큼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담백하고 밋밋하기 때문에 본질이 더 잘 드러난다. 

 기계와 대적하고 기계 대 인간의 전쟁 구도만을 부각했던 시온의 세계관은 아이오시대로 넘어와 인간과 협력하는 기계, 육체가 없는 매트릭스 프로그램과 공존하고 있다. 공존한 덕분에 회색 죽 같은 음식으로 연명해야 했던 현실의 인간들은 블루베리나 딸기를 먹을 수도 있고, 인공이긴 하지만 하늘과 태양을 볼 수도 있다. 기계의 도움으로 네오와 트리니티의 육신을 인간 전지 캡슐에서 구출해 올 수도 있었다.
 삶은 고통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매트릭스 4는 삶에 사랑이 더해지면 적대적 관계라고 생각했던 존재와 협력적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고, 평화롭고 행복한 깨달음의 장에 들어설 수도 있다고 말한다. 매트릭스를 벗어난 인간의 세계에서 시온과 아이오의 가장 큰 차이점은 기계와의 공존이다. 공존은 사랑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들은 나와 완벽하게 일치할 수 없으며 나 대신 결정하거나 살아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필연의 연결고리 속에서 우리는 또 나만의 필연적 연결고리를 엮어 가며 서로를 삶에 초대하기도, 내가 그의 삶에 초대되기도 한다. 각자의 필연적인 과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함께 성숙해간다.
 기억할 것은, 삶을 살아가는 모두는 내면의 존재를 만나는 각성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며, 사랑이 각성의 길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어떤 거울이든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공존하며 성장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는 운명의 사랑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더욱더 강하고 충만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스스로를, 그리고 사랑하는 존재를 믿자. 무엇이 일루전이며 무엇이 본질인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보자. 다시 말하지만, 누구나 각성할 수 있으며, 누구든 나와 함께 성장하는 자아일 수 있다. 그게 나에게는 당신일 수도 있다. 공존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괴로울 수도 있다.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현실을 철저히 부수는 과정은 어찌 보면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사랑은 그 두려움을 마주할 수 있게 하는 거울이다. 든든하게 마주하게 해 줄 수도 있지만, 때로는 몰랐거나 피하고 싶었던 무언가를 들이밀며 깨치고 나아가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존재로서 마주해야 하는 필연적인 과제일 뿐, 누군가가 그것을 들이밀고 들여다보라 한다는 것은 그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 어렵다고만 느껴 회피했던 문제를 당신이 마주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알려주고, 곁에 있어준다는 뜻일 수도 있다. 혼자서는 직면하지 못할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동안, 곁에 누군가 함께 해주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벅찬 일인가. 

영화 한 편을 보았을 뿐인데 삶을 깊이 사랑하게 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서 <인간 수업>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