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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Dec 31. 2022

나의 두 번째 풀코스 마라톤

오롯이 내 힘으로, 나를 마주하는 걸음걸음. 

2022년에 두 번의 풀코스 마라톤을 뛰었다. 마라톤이라는 꿈은 올 초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그런데 연말을 돌아보니 두 번이나 달렸다. 이래서인가 삶은 정말 알 수 없다. 


2022년 1월 6일,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66개 정도 작성했는데 적으면서도 '할 일 목록'을 만드는 게 부담스러워 일단 적어보고 1년 동안 다시 열어보지 않겠다 했었다. 내 무의식에 달성여부를 맡겨보겠다 했었던 거다. 적고 잊었는데 연말 다시 열어보니 '11월 손기정마라톤 풀코스 도전'이라고 씌어있었다. 세상에나. 그러니까 1년 전의 나는 손기정 마라톤 완주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잊었는 줄 알았는데 완주까지 해냈다. 


첫 '서울평화마라톤' 도전에는 걱정이 많았다. 일정도 쉴 새 없이 바쁘게 이어지고 있었고, 연습을 할 여유도, 일단 도전하면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용기도 없었다. 어느 순간에는 '신청했으니까, 일단 가보자.' 하는 막무가내 배짱 혹은, 체념 같은 것도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두 번째 '손기정마라톤' 도전할 때는 마음가짐이 전혀 달랐다. 신기하게 같은 풀코스인데 한 번 경험했다고 이렇게나 여유가 생겼다. 대회 당일 날씨를 계속 체크하고, 어떤 복장으로 달릴지를 정하고 나서 복장을 연습 때 입고 달리며 계속 테스트했다. 기능성, 디자인, 내구성 위주로.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경험을 통해 '할  수 있다'로 바뀌고 나서부터는 오히려 연습에 집중이 됐다. 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해낼 것인가'가 관건이 되고부터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졌다. 멋져 보이고 싶은, 좋은 기록을 내고 싶은, 혹은 나 스스로에게 좋은 경험을 주고 싶은 욕망들을 하나하나씩 실천해 나갔다. 매 순간 내 삶을 채우는 순간들이기에 행복하기로 결심했다. 


다소 비싸지만 입이 텁텁하지 않고 흡수가 잘 되는 파워젤을 4개들이 한 상자 주문했다. 이전 경험으로 저렴하고 많이 들어있는 가성비 파워젤도 나름 효과가 있지만, 대회 때는 좋은 걸 챙기고 싶었다. 목표는 지난 대회보다 30분 당긴, 컷오프 기준을 겨우 통과하는 5시간 내 완주. 


러너들의 모습을 검색해 봤다. 세계에서 잘 뛴다고 하는 여성 러너들이 어떤 장비를 착용하고 달리는지를 찾아봤다. 실력자들의 아이템에는 이유가 있다. 늦가을, 햇빛은 강하지만 기온은 다소 낮은 환경을 고려했을 때 선캡, 고글, 기능성 긴팔티셔츠, 타이즈 재질의 쇼츠. 머릿속에 달리는 내 이미지를 떠올리고, 계속 멋지게 달리는 나를 이미지트레이닝했다. 

이번 대회의 로망은 잠실올림픽경기장의 트랙에서 결승선에 골인하는 거였다. 이전 국제평화마라톤의 완주지점은 그냥 도로여서 감동이 덜했다. 올림픽 경기장 트랙을 달리며 골인하면 뭔가 손기정 선수가 느꼈던 감동을 비슷하게는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JTBC마라톤에서도 트랙 완주를 할 수 있었지만 국제평화마라톤 이후 컨디션 조절을 위해 10킬로 정도로 양보했었다. 다른 크루 멤버들의 결승선 통과 사진 배경에 트랙이 있어 많이 부러웠었다. 


달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삶은 길지만 한 가지 활동으로 다섯 시간을 지속하는 건 쉽지 않은 도전이다. 출발할 때부터 다섯 시간을 목표로 하고서 걱정하기보단 다섯 시간 강의를 하러 간다고 생각했다. 강의가 업이라선지, 다섯 시간 강의를 하는 경험을 떠올려보면 한 시간 한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었으니까. 


첫 한 시간, 10킬로 지점을 통과했다. 예상보다 빠르게. 두 번째 한 시간, 하프지점을 통과했다. 세 번째 한 시간을 조금 넘겨 30킬로를 지났다. 평균 5분 45초/1km의 페이스로 달렸는데, 시계를 바라보며 페이스 조절을 했다. 신나서인지, 들떠서인지 한걸음  한 걸음이 무척 신났다. 15킬로 지점에서, 30킬로 지점에서 파워젤을 하나씩 먹었다. 곳곳에 달리는 크루원들의 응원을 만날 때마다 반가운 마음에 힘이 솟았다. 급수지점마다 들르며 조금씩이라도 입을 축였다. 30킬로가 넘어가는 지점에서 몸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역시, 30킬로 이상의 LSD훈련을 하지 않고 달린 탓이다. 그래도 한 달 반 전 풀코스 완주한 경험이 LSD대신 몸을 받쳐주고 있다. 점점 골반이 무거워지고 발목이 아프고, 지난 완주 때 통증과 지겨움에 엉엉 울었던 36~38킬로 지점. 크루 멤버들이 깃발을 휘두르며 응원해 준다. 리더님은 피로회복제를 직접 만들어 건네줬다. 이 음료 뭐지? 콜라맛 + 커피맛 + 꿀맛?! 그리고 애정 어린 응원맛. 나에게 달리기를 가르쳐 준 가까운 지인도 캔디를 건네준다. 조금만 힘내면 4시간 30분 안에 완주를 할 수 있을 거란다. 


다리가 풀리지만, 걷지는 않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느려져도 걷는 것보다는 빠르다. 이미 체력보다는 정신력으로 앞으로 가고 있다. 정신력이라도 나를 이끌어주는 힘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에 힘이 난다. 마지막 트랙에 들어가 결승선의 시계를 보는데, 100미터 남짓 남은 거리에 시계가 4시간 29분을 가리키고 있다. 전력 질주를 하면 정말 4시간 30분을 넘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 8킬로 정도 동반주를 해 주던 가까운 지인이 뒤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스퍼트를 해보기로 했다.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니 선캡이 벗겨진다. 지인에게 모자를 던지며 맡겼다. 그는 어리둥절 모자를 챙기며 따라 달려온다. 마지막 100미터! 힘이 빠졌는 줄 알았는데 신비스럽게도 내 몸은 전력질주를 할 수 있다. 

아마도 출전인원이 많지 않은 대회였어서 그런지, 마치 단독 우승을 하는 것 같은 사진이 찍혔다. 그림 같은 순간을 멋지게 포착해 촬영해 준 가까운 지인의 센스다. 

그리고 이렇게 신나게 달리고 나서, 출전자들 중 30대 1위를 수상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큰 대회라면 아마 타지 못했을 상일텐데, 어부지리로 받은 것 같지만 뿌듯하고 감사한 상이다. 


삶에서는 이런저런 굴곡들이 참 많다. 예상치 못한 난관과 역경이 더 많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역경을 성장통으로 해석할 줄 아는 멘털의 힘이 한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걸 알게 된다. '어렵구나, 힘들구나' 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그 어려움과 힘듦이 얼마큼 나를 성장으로 이끄는지 미처 알지 못하게 된다. 이런 깨달음을 알아버린 나는, 내가 한계에 다다른 지점에 '아, 나는 또 성장하겠구나.' 하는 기쁨을 느낀다. 살면서 한계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를 뛰어넘고, 또 뛰어넘는 순간에 어떤 존재든 오롯이 혼자다. 혼자일 수 있어야 나를 뛰어넘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위안받는 시간은 달콤하지만, 그 시간에 머물러 있기만 할 수도 없다. 달콤한 무언가는 때로는 나를 유혹하고 뒤흔들기도, 혹은 안주하게 하기도 한다. 사는 시간 동안 나를 단단하게 다지고, 나다움을 찾아나가는 여정은 즐겁고 행복하다. 때로는 저리듯 외롭지만, 잠시 외로움을 바라보고, 그 시간을 지나 보내고 나면 이내 괜찮아진다. 


아마 풀코스 마라톤에는 몇 번 더 도전하게 될 것 같다. 어떤 의미를 얻을 수 있어서, 깨닫기 위해서가 아닌, 그 자체로 즐겁고 신나서. 삶에 큰 이벤트가 없어도 한 걸음 한 걸음, 하루하루가 즐겁고 신날 수 있다는 것,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에게 감사하는 것만으로도 참 많은 걸 배운다는 걸 알게 된, 나의 두 번째 풀코스. 


모든 사람들이 꼭 다 경험해봐야 할 필요는 없지만, 올해 내가 기뻤던 만큼, 도전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고, 할 수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다고 다짐한다. 내년엔 어떤 분들과 함께 달리게 될까. 누구와 달리든, 함께 또 홀로 달리는 시간과 경험을 공유하는 건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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