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무엇인가

쟈 낄룽 린포체 내한 법회 참석 후기

by 김예림

불자는 아니다. 그래서 법회에 참석한 것도 처음이었다.


페이스북에서 쟈 낄룽 린포체 승려의 내한법회에 대한 광고를 보았는데, '린포체' 라는 이름이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인 것 같았다. <영원한 진리를 찾아서>라는 책을 낭독해 줬던 소울메이트가 있었는데, 그의 낭독에서 '게쉬 린포체'라는 이름을 접했던 것.


나중에 찾아보니 '린포체'는 이름이 아니라,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으로 전생에 수행하다 죽은 자가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 환생한 것이 증명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세상엔 많은 린포체 님이 계신다. 그리고, 솔메이트가 안내해 준 린포체 님과, 내가 만난 린포체 님은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아무튼 린포체란 존재에 안내가 된 셈이다.


법회 가는 길, 차에서 문득 어떤 이끌림으로 마이클잭슨의 "Heal the world"를 틀어두고, 한 곡을 계속 반복해 들었다. 갑자기 숨이 가벼워지며 의식이 확장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를 향한 갈망이 지구를 향한 평온의 기원으로 바뀌고, 표정이 편해졌다. 가사를 기도처럼 들으며 평정한 감사로 가슴을 가득 채웠다.


법회 한 시간 전 법당에 도착했다. 차에서 잠시 명상으로 숨을 고르고, 지하주차장에서 4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한층, 한 층 층계참에 법구경을 발췌한 구절들이 적혀 있었는데, 올라가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접수를 마치고, 미처 마스크를 잊고 챙기지 않았는데, 감사하게도 선물로 받게 되었다(별로 쓰고 싶진 않았지만).

법당에서 린포체 님을 기다리며 조금 더 명상을 했다. 파장을 가까이서 느끼고 싶어서, 티베트수행을 1도 모르지만 맨 앞자리에 앉았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 채 린포체 님을 맞았다. 마른 체격에 맑은 눈동자, 온몸의 차크라가 텅 빈 듯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법문을 듣는 동안, 린포체 님의 존재 뒤에 맑고 반짝이는 오오라가 보였는데, 법문이 들리는 시간 내내 오오라는 일관되게 밝고 환한 빛으로 반짝였다. 법문을 듣는 자리는 가혹하게도 등받이 없는 절방석만 마련되어 있어서, 계속해 뒤척이며 몸의 자세를 바꿔야 했다. 수행도 체력이지 싶었다. 가만히 앉아서 경청하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었다니. 감사하고 맑은 법문인데도, 몸은 배배 꼬이고, 불편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몸은 급기야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일종의 탈출 시도다. 뭐 어쩔 수 없지. 맨 앞자리이지만, 몸의 반응을 그대로 두고,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에 나를 가두지 않으려 했다. 감사하게도 이따금씩 몸과 집중력이 허락해 줄 때에 온전히 나를 집중해 법문을 들었다.



1.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익숙해져라.


티베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죽은 육신과 최소한 3일에서 50일까지 함께 하며 죽은 이를 애도한다. 우리는 죽음에 두려움이 많다. 심지어 부모조차 자식이 죽으면 애정하던 자식의 육체인데도 두려워한다. 이는 시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죽음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죽음이 두려운가?


죽음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을 인정하면서, 그 두려움에 익숙해지고자 하는 의식적 도전이 필요하다.


2. 죽음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죽음과 삶은 같다. 다만 목적이 다르다. 생의 본질은 깨달음이다. 살아가며 느끼는 숱한 경험들이 모두 깨달음의 마중물이 된다. 깨닫는 첩경은 깨어있는 시간을 마치 꿈처럼 여기는 것이다. 잠들어 꿈을 꿀 때처럼, 생의 시간도 꿈처럼 가볍게, 즐기며 내어 맡긴다.


“아니, 삶은 현실인데, 어떻게 꿈이 될 수 있나요? 저는 진지하게 살고 싶은데요 “ 로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삶에서 충만할 시간을 늘리려면, 꿈처럼 가볍게 살아야 한다.


3. 티베트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가?


’ 사자의 서‘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육신을 모시고, 유족들과 사자의 몫까지 유품을 정리하여 좋은 곳에 기부한다. 사자의 몫까지 기부몫을 정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죽음과 삶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며 영혼 존재는 생자와 사자의 몫이 동일하다. 사자를 보낼 때 생전에 가까운 존재가 축원문을 읽어주는 것은 사자의 명복에 도움이 된다. 생전에 불편한 관계의 존재는 사자의 에너지를 산란시킬 수 있으니 축원문을 읽어주는 측근은 사자의 에너지에 맞춰 정해야 한다.


4. 죽음과 삶은 어떻게 다른가?


본질적으로는 같다. 죽음과 삶은 다르지 않다. 육체는 소위 비유하자면 게스트하우스다. 묵는 게스트 하우스에 미련이 남을 수는 있다. 그러나 몸은 게스트하우스일 뿐이다. 게스트하우스에 살면서 다양한 경험으로 깨달음에 다다르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죽음은 삶으로 얻은 착에서 벗어나는 해탈이 목적이다. 어찌 보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5. 죽음 이후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는가?


윤회가 전제된 불교적인 생사관 속에서, 인간은 사유(四有) 속에 존재한다. 사유란, 생유(生有)-태어남의 순간, 본유(本有)- 태어남의 시간부터 죽음의 순간, 사유(死有)- 죽음의 순간, 그리고 중유(中有)- 사유부터 생유까지의 존재 기간을 의미하며, 유(有)는 '존재'를 의미한다. 육체가 사망선고를 받은 후, 존재는 49일의 중유 기간 동안 중음신(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의 존재로 잠정적인 신체)의 상태로 머문다. 중음신으로 존재하는 동안 존재는 살아있던 시간에서 갖고 있던 착을 정리하고, 다음 생에서 어떤 존재로 태어나게 될지를 정하게 된다. 즉, 생유와 본유의 기간 동안 쌓아온 업식, 일종의 카르마를 중유기간에 정리하거나 결산하고, 다음 생유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 따라서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생의 시간들과 중유기간에서 일어나는 정리작업은 본질적으로는 같다. 티베트뿐만 아니라 윤회를 전제하는 많은 동양권 국가들이 사자가 죽은 이후 49일간의 제를 지낸다. 중유기간에는 죽은 자의 삶 시간 동안 쌓였던 업장이 잘 소멸될 수 있도록 잔치를 하고, 좋은 관계였던 사람들이 축원을 하고, 죽은 자의 유산을 세상에 나눈다. 이때 죽은 자의 몫까지도 할당하여 나눈다. 생사와 관계없이 존재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6. 억울하게 죽은 이는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가?


최근 한국에서 억울한 죽음의 이슈가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죽은 이를 애도할 때는 자비심을 채운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슈가 있는 것은 알지만 애도에는 필요하지 않다. 사자가 생에 대한 미련을 갖거나, 에너지가 산란되지 않도록, 자비심만 꽉 채워서 애도한다.


7. 생의 에너지 파장(오오라)을 어떻게 느끼는가?


오오라를 느끼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모두가 맑고 선한 마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생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긍휼감을 느낀다는 것이 느껴진다. 오오라를 느끼고 볼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모두가 진정성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된다.


린포체님은 더 많은 내용을 전해주셨지만 내 머리와 몸이 허락하여 받아들인 정도는 이 정도에 그쳤다. 그럼에도 나는 맑아지고 가벼워졌다. 점심으로 공양받아먹은 콩나물 비빔밥도 맑고 맛이 있었다. 절 밥은 처음이었는데 하나의 그릇에 모든 반찬과 디저트과일까지 한데 모아 받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먹고 난 후 설거지를 셀프로 하는 것도 참 좋았다.


법회가 끝난 후, 몸과 에고는 드디어 끝났다며 온몸에 기쁜 기지개를 활짝 켯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귀여운 에고다. 내면도 깊은 진리의 지식을 만났던 기쁨에 한껏 공명하고 있었다. 가방에 담아온 바나나 두 개는 의식의 배가 불러서인지 간식으로 먹을 겨를이 없었다. 린포체님과 통역을 맡아주셨던 선생님께 기쁜 마음으로 선물로 드렸다. 법당을 나서는 길에 스텝이셨던 분께서 "내일, 무료로 진행하는 질의응답시간이 종로에서 한 번 더 있어요. 초대드리고 싶습니다." 하며 말씀을 건넸다. 묘하게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참여자에게 주신 초대는 아니었고, 굳이 한번 더 초대의 말을 전해주신 것을 보니 가봐야겠다 싶었다. 온전히 내어 맡기기로 결심한 삶에서는 적시의 초대는 저항할 이유가 없다.



집에 오는 길은 참 가벼웠다. 갈 곳이 있고, 돌아올 곳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깨달음을 전해주고픈 이들에게 간단히 정리한 깨달음의 현장감과 내용을 나눴다. 이 또한 감사한 일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깨달음의 초대가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흘러가는 소식이 될 것이지만, 그 역시도 그들의 인연에 맡길 일이고, 나는 그저 나누는 존재가 되어 좋았다. 집에 돌아와 몇 통의 코칭통화를 하면서, 즐거움으로 마음이 꽈악 차올랐다. 삶은 꿈처럼 가볍게 살아야지. 죽음의 단꿈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린포체 님의 미소 가득한 얼굴이 떠오른다. Live like your dream!

감사! 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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