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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Jan 01. 2024

한 번의 숨을 정성껏 쉰다

반바퀴묵상 17 (55번, 20번) 23.12.21

23.12.21 #반바퀴묵상 #55번 #20번

55번

이런 다시 깨어남은 과거의 황금시대로 역행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신체 차원, 아스트랄 차원, 정신 차원 등 하위의 세 개 차원이 인과 차원 붓다 차원, 아트만 차원으로 새롭게 통합되는 것입니다.


20번

(1)

더 높은 수준의 주파수에서의 결정은 미리 계획되기보다는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떤 행동의 과정 속에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이 실제로 선물 주파수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은 당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 즉각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2)

현존 안에 존재하는 큰 효과 중의 하나는 숨을 깊게 만드는 것입니다. 현존은 숨을 통해 모든 인간을 하나로 연결시킵니다. 그러므로 현존의 분위기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의 실체로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3)

우리는 삶과 죽음의 고리 - 이 유전자 키와 연관된 코돈 고리- 를 통해서 현존이 또한 수천 년 동안 구도자들이 추구해 온 (23번째 유전자 키) 정수 quintessence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침묵 Silence(24), 무아 Selfessness(27), 순진무구 Innocence(3)및 찬양 Celebration(42)의 경험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2021년 우연히 찾아들게 된 명상센터에 입사하게 됐다. 명상이 뭔지도 몰랐고 내가 왜 거기에 가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다만 당시에 '명상'이라는 용어가 친근하게 느껴져 불현듯 검색을 하곤 했다. 2021년은 나로서는 내적 갈등이 심한 시기였는데,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것을 스스로도 몰라 괜찮은 척을 했다. 이쯤에는 이혼한 지도 2년 차라 주변 사람들도 시련의 아픔에 잘 적응하고 있는 줄 알았다. 나는 다시 이상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끄트머리를 한 켠으로는 쥐고, 한 켠으로는 나에겐 배우자 복 따위는 없다는 반 포기상태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사실은 포기하는 것이, 존재로 온전히 자립하는 것이, 관계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카르마를 내려놓기가 어려워 처절하게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산의 한 자락에 위치한 명상원에 우연히 찾아갔는데 마침 체험 클래스에 참여할 수 있었다. 요가복도 현장에서 바로 대여해 주어 느닷없이 요가복을 입고 명상클래스에 들어갔다. 1 차크라와 2 차크라를 강화하는 동작, 코어와 허벅지 근력을 단련하는 동작으로 이어진 시퀀스가 50여분 이어졌다. 클래스에는 나와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가 함께 참여했고, 팔다리가 다부지고 단단한 남자 강사가 클래스를 지도하였는데, 아사나가 상당히 독특하고, 요가 동작을 제법 많이 접했던 나로서도 낯선 동작과 분위기가 묘했다. 집중이 확 되고, 몸과 마음이 음악과 함께 공명하는 느낌이었다. 50분의 요가수업이 끝나고 20분 정도, 명상이 이어지는데 뜨거워진 몸의 에너지를 구 형태로 빚어 손바닥 안에서 굴리는 에너지명상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명상은 처음 방문한 체험자에게는 제공되지 않는 심화과정이었다는데, 왜 내가 이 명상을 처음에 하게 됐는지는 우주의 세렌디피티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몸의 에너지를 느끼며 골반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봤다. 수많은 태양이 갖가지 색으로 떠오르고 또 떠올랐다.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며 반갑고, 기뻤다. 왜 그런 감정이 치솟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명상원의 부원장님께 연결이 됐다. 그리고 그 명상원의 심화 명상과정에 참여를 결정하게 됐다. 


 명상원의 명상 프로그램은 근원이나 원리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23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상원의 마스터님과 원장님이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스터님의 가르침을 듣다가 명상에 들어가면 이내 깊은 이완이 찾아오고, 마음에 맺힌 숙제들을 푸는 힌트를 얻을 수 있는 통찰이 일어났다. 단지 수행자로만 참여하는 것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2017년에 취득한 요가 강사 자격증을 커리어로 내세워 명상원에 입사 지원을 했다. 나는 요가를 업으로 수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가 지도자로는 거의 초보자나 다름없었지만, "이거다" 싶을 때 깊이 다이빙해야, 얻고자 하는 것을 오롯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인턴 지도자는 기존에 벌던 돈의 1/3에 해당하는 월급밖에는 받지 못했지만, 일단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버텨보겠다는 각오로 마이너스를 감수하며 입사했다. 아마도 그동안의 미래가능성, 논리, 활용성을 고려하고 결정한 나의 결정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묵상하며 그때의 선택은 20번 유전자키의 존재가 내린 결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통찰이 스친다. 


"더 높은 수준의 주파수에서의 결정은 미리 계획되기보다는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떤 행동의 과정 속에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이 실제로 선물 주파수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은 당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 즉각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입사 후 나는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요가와 명상지도를 초급자 코스라도 마스터해야 했다. 원장님이 내게 내리신 명은 "숨이 있는 요가"를 마스터하라는 것이었다. 명상원에서 수행하는 지도자들을 차례로 만나 '숨이 있는 요가'의 숨은 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수집했다. 


숨은 나의 평정심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인내와 지구력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아사나든 자세보다 숨에 집중하고 숨을 깊이 쉬고 길게 내쉴 수 있다면, 몸과 마음에 깊은 이완이 일어난다. 몸에 나도 모르게 담겨 있던 경직된 근육이 사르르 풀리며 잘 되지 않던 동작이 부드러워진다.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수용하고 조금 더 느린 호흡 안에서 현존할 수 있다. 20번 유전자키는 호흡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현존 안에 존재하는 큰 효과 중의 하나는 숨을 깊게 만드는 것입니다. 현존은 숨을 통해 모든 인간을 하나로 연결시킵니다. 그러므로 현존의 분위기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의 실체로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숨이 있는 요가를 익히고 나서, 내 요가 지도는 조금 더 현존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일상의 호흡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호흡을 바라보고 호흡에 그 라운딩 할 수 있다면 수많은 행위로 점철되고 행위에 따라가는 호흡, 행위에 따라 휩쓸리는 삶의 양태가 존재로 돌아오게 된다. 감정이 조금 격해지더라도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다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6개월의 명상원 근무 후 나는 더 이상의 마이너스 수입 상태를 버티기 어려워지기도 했고, 마스터님과 원장님이 말하는 명상의 세계에 약간은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물론, 깊은 명상수행을 통해 나름의 각성이 이뤄진 것도 사실이며 여기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기도 하다. 명상을 통해 존재를 각성하는 여정을 통해 시련 후 드리워졌던 그림자를 많이 벗기도 했다. 다만 명상원에서 수행자로서 사는 삶의 인연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20번의 유전자키에서 설명하는 삶과 죽음의 고리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고리 - 이 유전자 키와 연관된 코돈 고리- 를 통해서 현존이 또한 수천 년 동안 구도자들이 추구해 온 (23번째 유전자 키) 정수 quintessence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침묵 Silence(24), 무아 Selfessness(27), 순진무구 Innocence(3)및 찬양 Celebration(42)의 경험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내 삶의 일의 구인 55번 유전자키는 통합의 여정을 묘사한다. 

이런 다시 깨어남은 과거의 황금시대로 역행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신체 차원, 아스트랄 차원, 정신 차원 등 하위의 세 개 차원이 인과 차원, 붓다 차원, 아트만 차원으로 새롭게 통합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살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은 언제나 두려움을 안고 사는 카르마의 무게를 감당한다. 매일매일 조금 더 잘 살고 싶고, 조금 더 나아지고 싶은 인간으로 살며 많은 실증적 가치들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는 문득, 통합의 차원을 경험하게 됐고, 중요하다고 느꼈던 것들에서 자유로워졌다. 이 자유의 시작은 호흡으로 그라운딩 하는 명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죽음에 대해 2023년 8월 내한법회에서 들었던 쟈 낄룽 린포체 님의 법문이 문득 떠오른다. 

죽음과 삶은 다르지 않다. 육체는 소위 비유하자면 게스트하우스다. 묵는 게스트 하우스에 미련이 남을 수는 있다. 그러나 몸은 게스트하우스일 뿐이다. 게스트하우스에 살면서 다양한 경험으로 깨달음에 다다르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죽음은 삶으로 얻은 착에서 벗어나는 해탈이 목적이다. 어찌 보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우리는 모두 매일 허락된 만큼의 숨을 맞이하며 살아간다. 내가 숨을 쉬는 것 같지만, 한번 마시고 내쉰 숨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들숨이 찾아오지 않는 순간, 삶은 끝난다. 숨이 찾아오는 동안 숨을 반갑게 맞이하고, 어떻게 들이쉬고 내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능동적으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인연이든 행위든, 내가 한다고 믿으면서도 오롯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숨으로 그라운딩 하고, 현존하는 속에 경험하는 침묵, 무아, 순진무구, 찬양의 경험들은 신체, 아스트랄, 정신차원을 넘어 인과차원, 붓다차원, 깨달음의 영역인 아트만 차원으로 통합된다. 아직 내게 허락된 차원이 어디까지일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오늘 지금 이 순간, 허락된 한 번의 숨을 정성을 다해 쉬어본다. 그것이 생명을 가진 자로서의 유일한 권리이자 현존의 소명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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