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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Jul 22. 2020

부캐를 만들자

자기 비난에서 벗어나 즐겁게 성장하는 법

인격은 하나일 수 없다.
(부캐를 만들자)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는 슬픈 노래 가사는 참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누구에게나 ‘나’는 수없이 많고, 나와 주변 사람, 혹은 대중이 기꺼이 사랑할 수 있는 나와 부끄러워 드러내기 싫은, 혹은 부끄럽진 않지만 드러나면 곤란할, 드러나면 외면당할까 두려운 나 등등이 내 속에 포진하고 있다.

일관성이나 진정성, 성장이라는 단어는 마치 한 사람의 인격이 점점 완성되어가는 완성형의 무언가. 인격이 하나의 작품 같은 느낌을 준다. 사람에겐 빛도, 그림자도 있게 마련인데, 빛나는 부분을 드러내 보이면 긍정적 피드백을 받고, 그림자가 드러나면 부정적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그림자가 드러날 때도, 짐짓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태도를 곁들여서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살짝 끄나풀만 보이면 공감을 얻는데, 여실히 드러나버리면, 그 드러남이 심지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 비난받는다.

 사실 그 두 가지의 경우가 모두 한 사람의 그림자일 뿐이다. 단지 어떻게 드러났느냐의 차이일 뿐. 실상은 수없이 많은 나의 조합이 나인데, ‘나’ 로서의 존재를 생각할 때 하나의 마스터피스(완성형의 예술작품이 아닌,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로서의 나를 표현하기 위해 이 단어를 썼다)로서 생각이 닿기 때문에 오히려 그 나 큰 부담과 자책, 자기 비난에 사로잡혀 나를 잃어버린다. 오랜 자기혐오가 시작된다.

 빛나는, 혹은 그늘진 나를 예리하게 조각내어 들여다보고, 그 틈새를 메꾸는 노력을 행동으로 옮겨 하나씩 작은 습관과 삶의 작은 변화를 반복하는 것으로 나에 대한 신뢰가 쌓여간다. 작은 일상의 변화는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인격의 작은 틈을 메우지만, 그 시간은 점차로 나에 대한 삶의 루틴과 원칙을 밑받침하는 자기 확신으로 이어진다. 진리로서의 확신이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인 나를 데리고 사는 ‘자기다움’의 확신이다. 확신은 존재를 빛내는 아우라가 된다. 작은 습관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아우라는 흔들리는 사람에게 울림과 동기부여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아우라를 가진 이에게도 인격의 크랙은 존재한다. 모두 불완전한 존재니까. 다만 크랙을 응시하고 들여다보는 방법이 다를 뿐.

나를 조각내어 조각을 들여다보고, 조각의 모난 부분을 구체적으로 다듬자. 혐오라는 감정에, 자책이라는 감정에 휘말리면 사고가 무뎌져 버리고, 슬픔의 수동성에 갇혀버린다. 조각을 들여다보는 방법으로, 부캐를 만드는 방법은 꽤나 유용하다.

가령 내겐 ‘명랑하고 깨 발랄한 나’가 기본 세팅이고, 자기를 갈아 넣어 병들면서도 상대를 ‘지나치게 맞추는 나’와 ‘쓸데없이 진지해서 웃음기가 없는’ 내가 있다. 이걸 뭉뚱그려서 ‘나’로 인식하기보다 각각의 나를 부캐로 만들어 대화를 나눠보는 연습 중이다.(꽤나 재밌다)

깨 발랄한 내가 되기로 선택했을 때 원 없이 깨 발랄하고, 명랑하고, 어리고, 생각 없다가, 급 진지한 부캐로 변모해 철학을 논하며 급 ‘맞추는 나’를 비판한다. 그 어떤 부캐도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그냥 다르고, 다름이 주는 차이 속에 나를 찌르는 바늘을 찾아내 예리하게 걷어낼 수 있다. 때로는 바늘을 걷어내기도 하지만, 숨은 즐거움을 행동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다.

유산슬도, 다비 이모도 좋다. 사실 누구에게나 부캐가 있다. 하나가 아니라, 수십수백 명이 있을 수도 있다. 부캐를 세심히 관리하는 것. 어쩌면 성장하는 존재의 자기 비난, 자기비판에서 벗어나면서 성장하는 행복의 다른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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