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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Feb 28. 2021

내 안의 내면아이 운동으로 만나기

DAY2. 어렵거나 힘겨운 일을 대할 때 드러나는 어린 내 자아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 있다. 키도 크고, 몸도 다부지고, 뭐든 잘 하는 사람인데 성격도 좋다. 친해지고 싶은데 가까이 다가가기 왠지 부담스럽다. 호감은 가는데... 저 사람과 어떤 공감대를 가질 수 있을지 망설여진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다 얼짱 몸짱 맘짱이라 나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래도 용기내서 친해져 보기로 결심한다. 이때 당신의 마음은 당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까? 


내가 말을 걸면... 대답해줄까?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 아닐까? 

왠지 다가갈 용기가 안나네... 


 운동을 습관으로 만들 때 마음에 올라오는 소리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새로운 습관을 만들고자 할 때, '변화' 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낯선 무언가에 매력을 느끼고 호감을 느꼈을 때,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익숙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마음에 올라오는 이야기들이 다소 부정적이라면, 짝짝짝. 정상이다. 우리는 낯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익숙한 것을 대하며 얻는 안정감을 포기해야만 낯선 것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생각했을 때 낯선 것을 대하는 호기심보다는 낯선 것을 경계하고 조심하는 태도가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즉, 낯선 변화를 받아들일 때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마음의 작용인 것이다. 


굳이 진화심리학을 언급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자존감을 위해서도 변화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할 수 있다. 늘 변화무쌍한 환경에 둘러싸여 안 그래도 아슬아슬 적응이 힘든 삶이다. 무언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위한 도전은 반반의 확률을 전제로 한다.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삶에서 맞닥드리는 숱한 챌린지가 많은데, 굳이 내가 자진해 만든 목표달성챌린지에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이 망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챌린지든,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자아상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대체로 목표는 달성하면 달성할수록 자기효능감이 높아지게 마련이지만, 목표의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내 역량이 향상되기보단, 의지력을 써야 하는 목표라면 오히려 자존감과 의지력이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운동습관을 만들 때 의지력에 기반한 목표가 거듭되면, 성공을 거듭하더라도 쉽게 지쳐버릴 수 있다. 목표 세우기를 거듭하는 내게 의지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신호는 운동이 하기 싫은 나에게 내가 하는 '마음의 소리' 로 알아차릴 수 있다. 




의지력을 써서 운동을 해 오다 보면, 의지력이 고갈될 시기에는 포기하고 싶은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 스스로에게 건네는 마음의 소리는 대체로 따뜻하지 않다. 무언가를 포기하기 싫을 때 (그러나 너무나도 포기하고 싶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소 가혹한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타인에게도 할 수 있을까? 어찌 어찌 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면, 그 타인과 나는 깊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그렇게 차갑고 가혹하게 채찍질하는 말을 듣고도 유지될 수 있는 관계는 거의 없을 것이다. 설사 상대가 성인 군자라 해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왜 그렇게 가혹하게 구는 걸까? 


첫째, 성공에 대한 기준이 높기 때문에
스스로 세운 목표가 높고, 여간한 노력으로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하는 경우다. 이런 사람은 운동 뿐 아니라 다른 목표들도 달성해 본 경험이 많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짧은 호흡의 목표에 몰입과 집중력이 높고 성취도가 탁월한 사람이 많지만, 꾸준히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함에 있어 경험치가 높지 않은 경우도 많다. 

 "코치님, 저는 단기 목표를 자주 자주 세워서 지속적인 습관을 만들어가볼까 해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짧은 호흡으로 돌아오는 목표를 마주했을 때 지속적으로 의지력을 쓰되 그만큼 충분한 인정과 보상의 단계를 거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목표의 난이도가 높아진다면 결국 지쳐서 좌절하게 된다. 


둘째, 목표에 대해 충분히 숙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목표에 도전해 어떤 결과를 낼 때, 해당 분야가 낯설고 서툰 분야임에도 자신이 이뤘던 다른 분야에서의 목표달성 과정에 적용하며 서툰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코치님, 저는 다른건 이렇게 미루거나 포기해 본 적이 없는데, 운동만큼은 번번이 포기하게 돼요. 정말, 자괴감이 든다니까요." 


다른 것은 분명 익숙하고 쉬운 접근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가령 독서 습관을 만들거나, 매일 하나씩 배울점을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기거나, 감사일기를 쓴다거나 하는 식의 습관만들기는 생각하고 인지적인 사고력을 쓰는데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상대적으로 쉬운 일일지 모르나, 몸을 쓰는 운동습관은 인지력 뿐 아니라 실행력, 체력, 근력, 지구력 등이 꾸준히 발휘되어야 하는, 다소 난이도가 높은데다 몸의 적응도가 높지 않은, 서툰 활동이다. 그런데 이미 다른 분야에서 일갈을 이뤘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일을 이룬 자기자신을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자기자신에 동일시한다. 그러나 새로운 일을 할 때는 분명 숙련도가 올라오기까지 물리적인 시간이나 자원의 투입이 필요하다. 서툰 일을 할 때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서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한다.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거듭할수록, 우리는 무언가에 서툰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한다. 들끓는 감정을 컨트롤하기 어려워하는 나,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야 하는 나, 진급, 이직 등의 이유로 빠른 적응이 필요한 상황에서의 나, 내 능력 이상의 챌린지에 맞닥뜨렸을 때, 챌린지 자체에도 어려움이 있지만 서툰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도 어려움을 느낀다. 빠르게 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싶기도 하고, 서툴러서 자꾸 좌절하려 하거나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나를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성장 과정에서 존재로서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던 사람조차, 서툰 나에 직면했을 때 그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한다고, 세상이 서툰 나를 기다려주지 않듯, 나 역시 서툰 나를 보듬어주지 못했다. 비단 운동이 아니어도 다른 도전에 마주하는 나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누구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하지 않고, 세상살이에 딱 맞는 정도만큼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탁월한 하나의 분야를 찾아 자기계발하는 것조차 평생의 숙제라 일컬어지는 세상인데. 왜 우리는 결핍된 적성과 재능에 직면할 때마다 그토록 나를 가혹하게 대할까. 


또... 미루고싶은거야? 
이정도의 의지력으로 뭘 어떻게 한다는거야? 

살찐 건 싫으면서, 이정도 힘든 것도 버티지 못한다는거야? 

운동... 정말 힘들어서 너무너무 싫어. 그냥 굶으면 안돼? (결국은 굶는 것에도 실패하고 만다) 


 운동을 번번이 포기해버리는 내게 내가 하는 말들을 떠올려본다. 누구나 성장하다 멈춰버린, 자라는 과정에서 충분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외면했던 내면아이를 속에 지니고 있다. 과거의 경험 - 이를 테면, 번번이 포기하거나 서툴렀던 나를 마주했던 - 이 우리에게 나쁜 기억을 남겼다면, 그건 그저 과거일 뿐이다. 그러한 과거가 우리에게 비슷한 종류의 상처를, 혹은 아픔을 주게 될까봐, 지레 겁을 먹고 나를 더욱 가혹하게 채찍질했다면, 내 안의 어린아이는 그저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 안심하고 성장할 수 있는 안전함을 보장받지 못했다. 채찍질한다고 해서 내면아이가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번번이 포기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몸을 쓰는' 내면 아이는 제대로 몸을 써보지조차 못한 채로, 운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겁을 먹고, 괴로울 것이라며 미리 위축되고, 포기를 준비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운동에 도전하는 당신의 내면 아이는 몇 살인가? 당신이 여태껏 만들어왔던 커리어를 키워온 내면아이보다는 훨씬 어리지 않을까? 몇 살 때까지 운동을 즐겁게 했을까? 

모든 낯선 것들에 도전할 때, 이루고 싶은 '완성형의 나' 보다는 그에 도전하는 서툰 나를 떠올려본다. 그 아이의 이미지를 생각해본다. 내 내면에서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몇 살인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떤 부분에 있어 주저하고 꺼려하고 있는지, 말 그대로 아이를 보는 눈길로 들여다보자. 


"몸쓰는 00(자신의 이름을 불러본다)아, 너 두렵니? 무엇때문에 주저하고 있니? 운동이 하기 싫다면, 왜 하기 싫을까?" 


내면아이가 용기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줄 때까지는 운동에 대해 무리한 목표를 정해두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운동하는 내면아이의 나이가 5살이라면, 6살이라면, 5~6살이 즐거울 만큼만 운동을 한다. 그리고, 내면아이가 충분히 즐거워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안전하다고 마음먹고, 충분히 할 수 있는 만큼만, 온전히 즐겁게, 성장하는 속도에 맞춰 움직임을 결정하고 내면아이의 성장속도에 맞춰 움직임의 완급을 조절한다. 그보다 서두르거나 그보다 많은 것을 바라면, 몸쓰는 내면아이는 이내 겁을 먹는다. 몸을 쓰며 자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상처받았던 숱한 과거를 떠올리며 더이상 운동을 하기 싫다고 도리도리칠 수도 있다. 체중 감량을 생각하며, 운동 효과를 생각하며 난이도가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힘겹게 의지력을 써가며 목표를 달성하려 했던 과거의 당신이 번번이 실패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세상은 서툰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딱히 세상에 모든 것이 능숙한 우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과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시간을 쓰고 있다. 모든 것에 능숙하면 좋겠지만, 서툴다 해도 딱히 세상이 돌아가는 데 서툰 내가 크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거기에 스스로 의미부여하고 상처받는 우리가 있을 뿐. 내면 아이를 치유하고 그들의 성장 속도에 발맞춰 움직임을 세팅하는 것은 과거의 상처가 없어지는 것이라기보다 내면 아이의 성장속도를 자각하고 내가 딱 알맞는 성장의 로드맵을 설정하는, 새로운 분야에 희망적으로 도전하고 성장하는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운동습관을 만들고 싶다면, 하지만 번번이 운동 목표에 좌절했다면, 내면의 몸쓰는 어린아이를 만나보자. 몸쓰는 내면아이와 화해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나만의 성장속도에 맞춰 기쁘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나를 돌보자. 서툰 분야에 도전하는 내게도 이러한 태도는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자발적이든 외부 환경에 의해서건, 변화를 마주하는 자기최적화의 과정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자기 존재를 느끼고 존재가 할 수 있는 만큼 행동하며 가용범위를 조금씩 넓혀나가는 것. 당신의 운동결심이 당신의 멘탈을 보다 유연하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게 만드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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