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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Sep 08. 2021

엄마의 내면 아이를만나다

대물림되던 두려움을 모녀의 사랑으로 만나다

 엄마에게 화를 냈다. 엄마에게 화를 낼 때는 불같이 낸다. 엄마의 방어기제나 두려움이 대물림되어 나도 고달프게 살았던 게 아닌가 싶은, 삶의 고달픔에 대해 묘하게 보상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낳아주고 길러준 고마움은 어디다가 팔아먹고, 고생한 기억만 떠올리며 보상을 받고 싶어 한다니, 인생의 단맛만 보며 살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심리가 아닌가. 그래도 굳이 트라우마나 어린 시절에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마음 버릇들을 찾아가며, 습관적으로 올라오는 불안 정서의 원인을 찾아들어가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감에 화를 내고 마는 것이다. 심리상담을 공부하고서 초기에는, 엄마에게 무척 화가 났다. 나를 왜 그렇게 대했나.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았나. 엄마도 나도, 자라는 중이었는데 엄마라는 이유로 원망을 했다. 부모의 역할은 그래서 무겁다. 초보자이면서도 서툰 모습은 허용이 잘 되지 않는다.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막중한 책임감이 따라오는 역할이다. 그에 반해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을 배우기는 쉽지 않다. 그런 무거움을 알면서 어제 또 엄마에게 화를 냈다. 


 어제는 엄마가 집에 찾아온다는 연락을 듣고 묘하게 들떠 있었다. 서른이 넘어 엄마를 만나면, 늘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다. 누구에게 말하면 많이 민망할만한 부끄러운 실수, 살면서 느끼거나 깨달은 것들, 시시콜콜한 험담, 조금은 얼굴이 빨개질만한 야한 이야기들까지도 엄마와는 비밀이 없다. 어릴 적에는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삶의 고락을 살아가며 하나씩 하나씩 마음을 꺼내어놓다 보니 엄마와 비밀이 없는 사이가 됐다. 한때 이야기를 나누며 깜짝깜짝 놀라던 엄마는, "야, 니 인생얘기, 드라마보다 더 재밌어." 하며 깔깔 웃으시게 됐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은 엄마의 삶 이야기를 나도 깔깔 웃으며 듣는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이런 이야기까지 나누는 모녀지간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오프 더 레코드가 많아 어디에 밝힐 수는 없지만. 어제도 엄마와 수다 삼매경에 빠져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엄마와 함께 식사를 할 때는 떡볶이나 파스타, 월남쌈 같은 여성스러운(?) 메뉴를 먹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식 파인 아버지와는 국밥이나 찌개, 고기류를 자주 드시기 때문에, 엄마도 딸과의 식사시간에 세련된 메뉴를 먹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보통은 내가 요리를 하지만, 어제는 나도 좀 특별한 음식을 먹고 싶어서 배달앱을 뒤적여 유명하다는 집에서 월남쌈을 배달시켰다. 좀 거리가 있는 집인 데다, 어제는 비도 와서 배달 팁도 제법 비쌌지만, 엄마와의 시간에 비하랴. 아깝다는 생각 없이 주문을 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한참을 엄마와 음식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도착 예정시간이 지났는데도 가게도, 배달어플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70분 후 도착한다던 음식은 90분이 지나도 깜깜무소식이다. 전화를 몇 번 해도 답이 없다. 채팅상담으로 주문을 취소하고 싶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시간은 벌써 저녁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 시간 전에는 저녁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있는 재료들로 대충 오픈 샌드위치를 만들고는 엄마와 나는 음식을 잊어버렸다. 취소가 되었겠거니 하고. 그런데 9시 반이 되어서 배달음식이 도착했다. 나는 배달원에게 문을 열어주고 싶지 않았다. 음식이 너무 늦어 취소 신청을 했으니 가져가시라 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미 황급히 마스크를 끼고 문을 열고 계신 우리 어머니... 정신을 차려보니 음식을 받아 덩그러니 거실에 놓고 있었다.


분명 이렇게까지 음식이 늦는 건 아무리 비가 온다 하더라도 기별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이라 이야기하며 취소하자고 말씀하던 엄마다. 문을 열기 전에 어떻게 할지 상의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친절하고 착하기만 한 엄마는 빗길을 뚫고 온 배달부가 안쓰러워 이야기를 까맣게 잊으시곤 문을 열고 음식을 받아버리신 것이다. 


"엄마. 이 음식, 어떻게 하려고?" 

"내가 집에 갖고 가서 내일 아빠랑 먹으려고." 

"왜?" 

"우리는 저녁 먹었잖아." 

"그러니까 저녁으로 주문한 음식을 저녁으로 먹지 못한 거잖아. 한 시간 반이나 기별 없이 음식이 늦게 와서.
그럼 우리는 약속한 서비스를 받지 못한 거잖아. 이건 항의해야 하는 거잖아. 아빠는 무슨 잘못(?)으로 식은 음식을 드셔야 해? 그리고 나는 왜 제대로 도착하지 못한 음식에 대한 값과 배달비를 내야 해? 엄마랑 나는 왜 배를 곯으며 기다리다가 부실한 저녁을 먹어야 했었던 거야?" 

"그럼 배달부가 힘들게 왔는데 그냥 보내니?" 

"배달해주시는 분은 힘드시긴 하셨겠지만, 그건 그분의 일이고 착오나 실수가 있었던 게 맞잖아. 착오나 실수까지도 그분의 일에 포함된 영역이라고. 낯선 배달부의 편의를 봐주느라 엄마 가까이에 있는 나나 아빠가 손해를 봐야 한다고." 


너무 화가 났다. 낯선 배달부를 배려할 수 있다. 그러나 배달부를 배려하자고 엄마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가까운 것들,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은 결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인데. 무엇이 중요한지 엄마는 늘 생각 없이 표면의 요구에 따라가 버린다. 어릴 적, 낯선 누군가를 배려하느라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꼈던 숱한 시시콜콜한 억울함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고 결국, 참다 참다 엄마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엄마, 나랑 취소하자고 나눴던 얘기들은 아무것도 아닌 거야? 엄마는 의도가 없었다고 하지만 나와 나눈 이야기도 기억하지 못했고, 새롭게 상의를 해야 했거나 이미 합의한 것들도 지키지 못했잖아. 엄마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하지만 엄마의 행동은 나와 엄마와 관계에서 일어난 것들을 존중하지 못했잖아! 게다가 배달업체에서는 이런 관행을 그냥 넘기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고!" 


 엄마는 당황하고 또 당황하다 내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었다. 처음엔 사과를 연신 하다가, 용기 내어해 주신 이야기가 마음에 담겼다. 


"예림아.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낯선 사람이 엄마로 인해 불편함이나 번거로움을 겪는 것이 엄마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불편해. 배달부도 그랬던 것 같아. 단순히 불편한 것을 넘어 불안한 마음이 올라와서, 불안함 때문에 빨리 음식을 받고 보내자 했던 것 같아. 그동안 살면서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하기 전에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을 빨리 끝내버리려고 했던 것 같아. 왜 이렇게까지 불안감이 올라오는지 엄마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아." 


만일 나라면 어땠을까. 사소하게 일어난 일이라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을 엄마는 온 마음을 담아 돌아보고, 자신 속의 내면 아이를 만나고 계셨다. 의도는 없었지만 상대를 서운하게 할 수 있었던 행동에 진심으로 사과하고서, 왜 그런 행동이 올라왔는지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엄마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라면 아마도 어쭙잖게 자기 방어를 하며, 뭘 그런 걸 가지고 예민하게 구냐며 역으로 따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는 60이 넘은 나이에도 스스로를 돌아보며 관계와 내면에 대한 탐구를 열린 마음으로 하고 계셨다. 오로지 자신과 딸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엄마에게 화를 내고서, 나도 엄마와 비슷한 불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도 엄마가 나를 기르며 보였던 불안이 비슷하게 대물림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가만가만 들었다. 엄마의 내면 아이를 만나고, 화를 내고 있는 내 안의 내면 아이를 만났다. 엄마와 나는 한편으로는 귀여운 내면 아이를 소환해 꼭 안아주고는, 엄마와 나 둘 다 이제는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가 없음을,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옳은지를 생각할 여유를 가져도 된다는 것을, 그리고 불안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로 충분히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을 강하고 유연하게 해낼 힘이 있다는 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둘의 내면 아이들이 마치 소설 속 빨간 머리 앤의 앤과 다이애나처럼, 정답게 손을 맞잡고 그동안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을 가볍게 털어 내며,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기 방어 없이,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이 감사하고 가벼웠다.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늘 어렵다. 때로는 쓰라린 직면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엄마와 나이기에 서로 손을 맞잡고, 직면하는 와중에도 아프지만 서로 기대며 용기 있게 두려움에 마주할 수 있다. 이는 서로에게 헌신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서로에게 헌신하고 싶은 만큼, 스스로를 믿는 마음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엄마를 좋아하는 마음과 더불어 엄마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다. 엄마의 좋은 면을 닮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좀 부족한 면을 닮았더라도, 엄마 딸이니 이 정도는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한다. 엄마 역시, 스스로 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더라도 자신을 닮은 딸을 좋아한다. 어떤 면에서 엄마는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서로 없이 살았던 삶의 시간보다 함께 덧대어 살아온 삶의 시간이 더 길어진 이후,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이의 모녀는 어느덧 양육자와 피 양육자의 관계를 넘어 함께 성장해간다. 


 엄마는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 삶붙이인 고양이들을 쓰다듬었다. 

 "니체야, 도나야. 너희들 왜 이렇게 예쁘니. 건강해야 해. 아프지 마. 이렇게 건강하게, 씩씩하게 토실토실 잘 자라야 해." 


엄마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엄마와 성장하는 시간이 기뻐서. 엄마와 나누는 삶 시간이 고마와서. 엄마와 나눌 이야기가 아직 많아서. 



사랑하는 엄마,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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