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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Sep 21. 2021

원하는 것을 하세요

자신을 믿고,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

나를 믿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학교 다닐 땐, 열심히 하고도 원하는 성적이 나올지 나오지 않을지 예측하기 어려웠고, 잘 나온 성적도 온전히 내 것이라 믿기가 어려웠다. 겸손을 미덕으로 가르쳐주신 부모님들, 선생님들의 가르침은 늘 "이번에 잘 나왔다고 해도 방심하지 마라"였다. 한편으로는, "이번에 못했다 해도, 다음번까지 못하면 안 된다" 였으니까. 못한 나도, 잘한 나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나 혼자만의 능력을 믿는 것도 어려웠는데, 여러 관계가 뒤섞이며 생기는 일들은 더욱 믿기 어려웠다.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약속들은 숱하게 틀어졌다. 사람의 마음은 그때그때 변하고, 생각도 말도 계속해서 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계속해서 바뀌었으니까.


예측할 수 없는 삶 속에서 무언가를 붙들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일 터다. 종교든, 신념이든, 타인의 인정이든, 세상의 기준이든 혹은 아주 드물게는 자기 자신이든. 나는 여기저기 숱하게 매달렸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는 잘 되길 바라는 욕망이라기보단 두려움이었다. 불안정한 내가 그나마도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발판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갈구하고,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사느라 부득이 만들어지는 관계의 틈에 깊이 좌절했다. 그만큼 나는 의존적인 사람이었다. 좌절이 두려워 갈구하는 것을 줄 것 같은 사람들을 멀리하기도 했다. 대체로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내게 요구를 하는 방식을 어려워하곤 했는데, 이는 내가 안전하게 거절할 (관계는 견고하게 유지되면서 내 뜻을 전하는)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떠나는 방식으로 많은 관계를 틀어지게 만들곤 했다.


원하지 않는 상황을 습관적으로 만드는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다가, 참고 또 참고, 혹은 그를 변화하게 만들려고 나를 변화시키며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가 끝내 관계를 놓아버렸던 경험을 했다. 내 의지로 관계를 놓고 보니, 그뿐만 아니라 어떤 관계를 만듦에 있어 나 스스로 내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고 관계로서 나를 확인하고 싶어 했던 내가 보였다. 견고한 관계가 유지되어야만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관계가 흔들릴 때 끊임없이 긴장 속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했던 나는, 사실 상대가 만든 상황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라기보단 내 두려움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늘 두려웠기에 쉴 수 없었고, 그럼에도 관계가 더 나빠지는 것을 피하려 괜찮은 척을 하려고 애썼다. 억압된 감정과 상처들은 끝내 건강을 나쁘게 만들었다.


두려움에 직면하고 원하는 것들을 직접 해내는 경험을 했다. 인연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인연을 대하는 태도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일들이 그랬다. 두려움을 걷어내고 나면, 나는 행동에 자유로워지고, 또 내 행동에 대한 책임도 용기 있게 질 수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사랑의 방법을 선택하는 일도, 그로 인해 생기는 반응과 관계의 변화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도, 상대의 반응과 관계없이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도.


삶의  시간은 감정을 시시각각으로 변하게 한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만나다 보면, 감정을 만드는 두려움들이 들어온다. 두려움의 실체를 가만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두려움과 마주할  있는 용기를, 혹은 두려움을 포용할  있는 사랑을 끌어올리려 숨을 들이마셔본다. 이전과 다르게 나는 두려움을 피해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움을 작게 쪼개고, 마주하며 지금의 순간을 용기 있게 지나 보내는 나를 만난다. 조금  강해진 나는 어떤 관계가 나를 아프게 할까  나를 칭칭 싸매기보다, 나와의 관계가 서로의 생명의 근원을  강하게 다져줄  있는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 의지하고 의존하고 싶던 관계는 자립으로, 이별이 두려워 불편한 이야기들을 회피하기만 했던 관계는 이별을 마주할  있는 용기로(이별을 앞에 두고도   의미를 찾고 성장을 해낼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갈등을 피하고 싶거나 말로 쌓는 업을 피하고 싶어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두려움은 좋은 글과 작품, 예술에 대한 은유로 승화시킬  있는 지성으로 이끌고 싶다. 그래서 결국 지금이 생명력으로 가득한 순간임을,  하루하루가 두려움보다는 사랑을 만나는 시간이라는  나누고 싶다.


내 안의 나는 강하다. 얼마나 강한지 모르고 두려움이 이끄는 상상 속 고통을 피하기 위해 싸우고 있을 뿐. 싸우기를 멈추면 내면의 파도와 태풍은 고요해진다. 진심이 전해졌는지 궁금해하는 마음을 만나다 보면 조금 씁쓸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땐 씁쓸할 마음을 안고서 좋은 책과 좋은 음악, 좋은 기억들을 불러오기하며 나를 만난다. 하루하루를 산다는 건, 성장할 수 있기에 퍽 즐거운 일이기도, 내려놓을 수 있기에 퍽 홀가분한 일이기도.

오늘은 그럼에도 나는 진심으로 사는 걸까, 진심을 알아줄까 싶어 조금 씁쓸한 나를 만났다.

씁쓸하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을 했고, 했던 일들은 옳고, 결국 필요했던 배움과 에너지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잘 산다는 건, 내 안의 우주를, 나보다 더 큰 나를 믿고 만나며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

에고가 만드는 걸림돌로 내게 주어진 일들에 가림막을 치지 않을 것.

가림막을 걷어낸 후에 다가오는 자유로움으로 모든 가능성에 나를 열어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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