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 직장
새벽 산책의 상쾌함을 샤워로 마무리한 정 박사는 명상을 마치고 스케줄을 체크해 보았다.
오전 9시: D 기획사 강연
주제: 파워 직장인 마인드
장소: 백두웨딩홀.
강연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정 박사는 언제나처럼 강연의뢰업체 사장과 담소를 나눴다. 강연을 통해 직원들이 정신을 무장하는 것처럼, 강연을 의뢰한 사장 또한 정신무장의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것이 정 박사의 오랜 신념이기 때문이다. 사장과 직원이 서로 잘해야 한다는 것이 대화의 주 내용이다. 사장과의 담소를 마친 후 강연은 시작됐고 시간은 흘러 시계의 분침이 9시 45분의 언덕길을 넘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어질 내용은 ‘직장은 행복의 보금자리이다’입니다.”
50여 명의 청중들이 수군거렸다. 지금까지 어느 강연에서도 ‘직장은 행복의 보금자리이다’라는 말을 던지면 청중들은 늘 수군거렸다. 정 박사는 평소 하던 대로 태연히 말을 이었다.
“전 알 것 같은데요. 여러분들께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청중들은 표정으로 보아 어리둥절했다.
“‘직장이 무슨 행복의 보금자리야!’라고 생각하시는 거잖아요. 지금. 그렇죠?”
대답은 못했지만 다들 긍정하는 눈초리였다.
“그래요. 직장이다, 회사다, 일이다 하면 떠오르는 게 뭐겠어요? ‘힘들다’ ‘짜증 난다’ ‘스트레스받는다’ ‘지겹다’ 주로 이런 단어들이겠지요.”
2초 정도 의도적 침묵의 시간을 가진 후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직장’하면 떠오르는 부정적인 단어들의 연상을 긍정적인 것들로 바꾸어나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직장 = 행복의 보금자리’라는 공식이 진실이라는 것과, 그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직장에서 성장하기도 어렵고, 오히려 도태되어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청중들은 시시콜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직장은 행복의 보금자리’라는 진실을 깨닫기 위해 머나먼 여행을 떠나봅시다!”
정 박사는 단상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제가 질문을 하나 하지요. 여러분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청중들은 웬 생뚱맞은 질문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정 박사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여러분은 왜 사시나요?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얻기 위해 사시나요?”
“.........”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엄마의 포근하고 안락한 뱃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는데 엄마가 갑자기 힘주어 밀어내는 바람에 아니면 간호사언니가 끌어내서 어쩔 수없이 사는 건가요?”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농담에 다행히도 약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날씬한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 먹고 싶은 거 참아가면서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들, 회사 끝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헬스장 구석에서 낑낑대며 바벨을 드는 남성들, 새벽잠을 쫓아가면서 코피 나게 공부하고, 커닝이라도 해서 학점 잘 받겠다고 축소복사 하는 학생들,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 타고 마늘냄새, 파냄새, 겨드랑이 냄새 다 맡아가면서 회사에 나가서, 그것도 상사한테 깨져가면서 일하는 이유말이에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잘 먹고 잘살려고요!”
정 박사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린 듯한 한 사람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을 좀 고상한 단어로 바꾸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행복 아닌가요?”
세 번째 줄에 앉은 아리따운 숙녀분의 대답이었다.
“그래요. 학교 다닐 때 국어 잘하셨나 봐요?”
숙녀는 쑥스러운지 고개를 떨구었다.
“제가 원하는 답도 바로 ‘행복’이었어요. 아마도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들을 감당해 내는 것 같습니다.”
정 박사는 잠깐 멈춰 섰다가 말을 이었다.
“이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행복’, 더 근사하게 표현하자면 ‘행복추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청중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그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야겠죠? 그렇죠?”
50여 명의 눈이 커졌다.
“여러분은 인생의 행복을 주로 어디에서 찾나요? 언제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시나요?”
“먹을 때요. 아니 잠잘 땐가? 히히”
“여행 갈 때요.”
“영화요. 야한 영화! 푸힛”
“데이트할 때가 제일 행복하죠.”
“수다 떨 때 젤 행복해요.”
“인터넷 고스톱!”
“술 마실 때가 제일 좋지 뭐.”
“나이트클럽에 가서 발바닥 비빌 때.”
청중들은 각자 자신들의 상황에 맞는 답변들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그 덕택에 강연장은 활기를 띄었다. 답변 중에는 언급하기 곤란한 야한 대답도 있었다.
“맞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답변을 이렇게 정리하고자 합니다. ‘노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라고요.”
‘노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라는 표현에 청중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정 박사는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가장 즐겁고 신났던 추억은 대부분 노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비단 어릴 적뿐만 아니죠.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께서 말씀하신 즐거움들을 자세히 한 번 살펴보세요. 잠자고, 영화 보고, 나이트클럽 가고, 데이트도, 여행도...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일하고 공부하는 시간이 아닌 노는 시간의 일부임을 알 수 있잖아요. 우리들의 즐거움은 노는 것의 부분집합이었던 겁니다.”
청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일, 공부, 숙제, 다이어트, 건강관리... 이런 것들을 놀기보다 더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겁니다. 대학 교수님들한테 ‘공부하고 노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좋으세요?’라고 묻는다면 그분들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하실까요?”
청중들은 난감한 듯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천하의 어떤 교수님도 공부가 더 좋다고 대답하실 분은.... 아마도 안 계실 겁니다.”
쑤욱 훑어보니 몇몇 사람이 긍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만약 계신다고 하더라도 극히 드물 겁니다. 그리고 그분들도 공부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일반인들보다 공부를 덜 싫어하는 것이겠지요. 이처럼 우리 인생의 행복은 결국 노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겁니다.”
정 박사는 청중들을 한 번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근데 대학에서 MT나 졸업여행을 다녀온 학생들한테 재미있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세요?”
“.........”
“90% 이상이, 아니 95% 이상이 재미없었다고 대답을 합니다.”
청중들 대부분의 표정에는 ‘그럴 리가’라는 의문부호가 그려져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도 그랬었던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믿기지 않으시죠?”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이 수치는 사실이었다. ‘재미있었느냐?’는 질문은 대학에서 정 박사가 MT나 졸업여행을 다녀온 학생들에게 자주 묻는 질문이었고 그때마다 이 수치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죠. 아니! 놀 때도 즐거움을 모른다면 도대체 인생의 즐거움을, 인생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청중들의 표정에도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재미있는 분위기를 본인 스스로는 만들려고 하지 않으면서 ‘학생회 임원이나 선배 혹은 누군가가 나를 재미있게 해 주겠지’라고 생각하며 소극적인 자세로 행사에 참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청중들은 ‘아∼’하는 탄성을 합창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어디서건 즐거움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즐거워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한테는 사소한 재미거리도 즐거움이 되고, 아무리 재미난 상황을 만들어도 마음을 닫은 사람한테는 즐거울 수가 없잖아요.”
본인들도 그런 유형이었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라도 하듯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청중 대부분이 정 박사와 눈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아주 강한 톤의 짧고 단호한 정 박사의 한 마디에 몇 사람이 깜짝 놀라는 몸짓을 보였다.
“하지만! 노는 것이 아무리 즐겁더라도 우리네 인생 놀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왜냐고요?”
“.........”
갑작스러운 질문 때문이었을까? 어떤 대답도 없었다.
“여러분들께서 너무도 잘 아시다시피 놀 때는 좋지만 놀기만 하면 자신의 발전이 없잖아요. 치열한 생존경쟁사회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일하고, 코피 나게 공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잖아요.”
청중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노는 것’에 존재하고 있는 양면성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노는 것이 즐거움만을 주거나 행복만을 선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즐거움의 이면에는 악의 이빨을 드러내고, 나 자신의 성장을 갉아먹고 있는 악마의 모습이 숨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노는 것의 뒷모습을 빨리 찾아야만 합니다.”
정 박사는 청중들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아까 나이트클럽 가는 게 제일 행복하시다는 분 계셨었죠?”
“김 대리요∼. 김대리님이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네 번째 줄에 앉아있던 한 남자를 집중적으로 가리켰다. 쑥스러운 표정의 그는 긴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멋지게 파마도 했다.
“나이트클럽하고 친하신가요?”
정 박사가 김대리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아니요. 1주일에 한 번밖에 안 가요.”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직장인이 1주일에 한 번 나이트클럽에 간다면 상당히 많이 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웃음이 터졌을 것이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만약에 말이에요... 김대리님한테 한 달 동안 매일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추고 술 마시고 헌팅하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겠어요?”
김대리는 아주 잠깐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철인도 아니고 어떻게 매일 나이트에 갈 수 있겠어요. 그것도 한 달 동안이 나요.”
“그러니깐 힘들어서 못한다는 말씀이시네요?”
“힘든 것도 있지만 매일 가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가끔 가야 좋은 거지......”
정 박사는 김대리의 이야기를 듣고 연단으로 돌아왔다..
“그렇습니다. 김대리님께서 아무리 나이트클럽을 좋아하신다고 해도 한 달 동안을 매일 간다면 그건 아마도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일 것입니다.”
일 년 내내 노는 날로 지속된다면
놀이도 일과 마찬가지로 따분한 것이 된다.
-셰익스피어-
다음 편에서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