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0번 읽기] 1장 - 남루한 여행 가방

로마서 10번 읽기

by 박동기

삶의 비의(秘意)를 다 통과한 사람은 투명한 평화를 갖는다. 오래 끓인 맑은 곰탕이 더 담백하다. 로마서를 징검다리 삼아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담는 글을 쓴다. 교회에서 로마서 강해를 시작했다. 로마서를 10번 읽는 것을 결심했다. 로마서 16장 전체를 내 방식대로 해석해서 브런치에 연재하기로 한다.


로마서 읽는 시간은 남루한 여행배낭을 내려놓는 시간이다. 어둡고 남루한 가방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 어두운 기억은 세월이 연마하면 광채로 드러난다. 고독은 처절한 고립이 아니다. 고독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감미로운 시간이다. 고독 속에 로마서를 읽기 시작한다. 주님 앞에 남루한 여행 가방을 내려놓는다.


일생 동안 챙겨 온 염려, 욕심과 걱정, 사람들 앞에서 들키고 싶지 않았던 상처들이 가득 담긴 이 '남루한 여행가방'을 주님 앞에 열어 놓는다. 주님께 "이게 저의 전부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옴을 느낀다. 순례자의 마지막 삶에 남는 것은 남루한 여행 배낭이다. 누추한 가방을 하나님께 내려놓을 때 하나님께 잘 살았다고 칭찬받고 싶다.


로마서는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이다. 로마서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다가온다. 하나님 숨결은 내가 살아있다는 표시다. 하나님 숨결은 사랑이다. 내 한숨의 호흡은 주님이 주신 생명이다. 로마서는 지나가는 여성의 아릿한 향수처럼 매력적이다. 주님 향기 안에 안겨 고요히 숨을 쉰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성과와 확실한 내일로 살아간다. 하지만 신앙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내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빛은 믿음뿐이다. 절박한 현실을 벗어나 꿈을 꿀 수 있는 힘은 오직 믿음이다. 죽음마저 희망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 담대함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에서 나온다. 믿음으로 살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


언젠가 내 여행은 마침표를 찍는다. 언젠가 제 여행이 끝나 주님을 만나는 날, 내 남루한 가방을 들어주며 말씀해 주신다."잘 살아냈다" "그래도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거라."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의 음성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마음에 감미로운 비가 내린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다. 아버지를 부르면서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린다. 그동안 살아온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삶이 너무 외롭고 고독했다고 하나님께 말한다. 하나님은 내 눈물을 닦아 주신다. 그래 고생했다. 힘든 세상 살아가면서 참 고생했다. 그래 잘 살아왔어. 이런 소리를 듣고 싶다. 하나님을 만나 꼭 안고 싶다. 예수님의 따스함 손길을 느끼고 싶다.


천국에서 먼저 돌아가신 어머님을 만나 꼭 안아보고 싶다. 엄마의 따뜻한 마음을 품고 싶다. 무조건 나를 인정해 주신 어머님. 요즘 어머니 생각이 참 많이 생각난다. 어머니 산소에 가면 자주 운다. 산소 앞에 울다 보면 어느덧 땅거미가 올라와 주위가 어둑해진다. 그 어머니를 천국에서 만나고 싶다. ‘신의 악단’ 영화에서 박교순이 목놓아 외쳤던 그 어머니를 외치고 싶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 주님과 함께 하는 그 세상이 빨리 오길 소망한다. 천국 소망이 있기에 지금을 잘 살 수 있다. 황금보다 지금이다. 지금의 삶을 잘 살아낸다.


나는 삶의 순례자다. 내 목적지는 천국이다. 하루 잘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 믿음으로 잘 살아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주님과 더욱 가까이 가는 곳으로 갈 희망이 있다. 주님의 발 앞에 누추한 순례자의 배낭을 내려놓는다. 순례자는 돌아갈 집이 있다. 천국이다. 그곳을 꿈꾸며 살아간다. 그곳에는 갈등이 없다. 화목만 존재한다. 모든 갈등들이 풀리는 곳이다. 아픔이 없는 곳이다.


하나님의 은혜대로 살기 위해 로마서 10번 읽기에 도전한다. 로마서를 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들어간다. 주님을 통해 얻은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더욱 깨닫게 된다. 주로 말미암은 새로운 호흡을 기뻐 뛰며 나아간다. 로마서에 깊이 빠져든다. 로마서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 산 소망을 갖고 살아간다. 산 소망이 찾아온다. 로마서에서 주는 감동을 갖고 살아간다. 로마서가 주는 복음의 진수를 깨닫는다. 로마서를 읽기 위해 막힌 일을 빨리 처리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일에 발목이 잡히지 않도록 빨리 처리해 달라고 기도한다. 인공지능을 통해 모든 일들을 빨리 처리해 달라고 기도한다. 다행히 잘 처리가 되어 로마서를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로마서를 통해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싶다. 복음의 진수를 깨닫도록 하나님은 나를 인도해 주신다.


길이요 진리이신 주님을 찬양한다. 진리 되시고 생명 되시는 오직 예수를 따라간다.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것은 어머님을 전도한 것이다. 되돌아보면 어머님과 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렸던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요즘은 어머님 생각이 참 많이 난다. 그 어머님이 예수를 믿지 않고 지옥에 가셨다면 얼마나 슬플지 생각하면 끔찍하다. 어머님과 천국에서 볼 날을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울지 않는다.


로마서 1장 전체를 읽으며 부르심(Calling)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다. 나는 주님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보호아래 들어간다.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운 부르심 앞에 빚진 자라고 고백한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복음의 빚을 졌다고 고백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내 주위의 사람들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직장에서 피하고 싶은 동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정말 얄밉다. 그래도 사랑에 빚진 자이니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내 조그마한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묻어나야 한다. 말 한마디 온도가 따스해야 한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직 부끄럽다. 회사에서 하나님 이야기하는 것이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바울의 고백을 신뢰한다. 내가 견고한 믿음을 가진다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날도 올 것이다.


담임 목사님께서 '선지적 사도성'이라는 용어를 설교 시간에 말씀해 주셨다. 선지적 사도성은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선지적), 그 뜻을 세상 속에 심고 세우기 위해 보냄을 받은(사도적) 성향"을 의미한다. 믿음의 본질은 예수님 인격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해 그분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선지적 사도성을 주신 목적은 시대의 소리를 듣고 보냄을 받은 자의 사명의 불길을 일으키는 것이다. 멈추지 않는 뜨거운 복음의 심장을 갖고 사명의 길 위에 영혼의 궤적을 남기는 것이다. 사명은 믿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을 헤쳐나갈 돌파할 은혜를 주신다. 가슴 뛰는 하늘의 환상을 보여주신다. 세상을 향해 복음을 포효하는 것이다. 힘들고 방향을 잡지 못해 방방황하더라도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로마서를 읽으며 은혜의 비대칭성을 깨닫는다. 나의 어떤 행위와 노력으로도 하나님이 베푸신 거대한 사랑을 결코 갚을 수 없음을 고백한다. 은혜의 비대칭성을 깨달으면 빚진 자의 심정을 갖게 된다. 선지적 사도성과 은혜의 비대칭성을 깨달아 빚진 자의 심정, 거룩한 부채의식, 거룩한 책임감을 품고 살아간다. 거친 야성을 회복하여 세상을 향해 정면 돌파한다.


선지적 (Prophetic)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깊은 통찰, 시대의 흐름을 읽는 영적 분별력, 죄에 대한 지적과 회복 선포를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선지적 영성이다.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약속하신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적 (Apostolic)은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것이다. '사도(Apostle)'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뜻은 보냄을 받은 자이다. 단순히 심부름을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 새로운 곳에 그 나라를 세우는 개척자다. 사도성은 부르심을 따라 삶의 현장을 개척, 돌파, 복음의 기초를 놓는다. 사도성은 척박한 땅에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심는 것이다. 삶의 자리로 나가 그리스도의 문화를 심고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사도적 영성이다.


선지적 사도성은 하나님께 말씀받아 세상 한복판으로 역동적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세상에 파송되어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선지적 사도성 모델은 로마서 1장의 바울이다. 바울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복음의 내용을 통달하고 있어 선지적 능력을 갖고 있다. 바울은 그 복음을 들고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교회를 세우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했다.


선지적 측면을 내 입장에 적용해 본다. 내가 개발 업무나 글을 쓸 때 단순히 기술이나 지식만 의지하는 것이 아닌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치는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는 무엇인지 영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사도적 측면에서 나의 길은 하나님이 주신 뜻을 깨닫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다. 회사 내에서 정직과 성실의 문화를 세운다. 신우회를 만들어 동료끼리 기도한다. 믿지 않는 동료들에게 삶으로 보여주는 복음의 기초를 놓는다.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 그 뜻을 품고 가정과 일터라는 선교지로 출근하여 작은 예수로 살아낸다.


선지적 사도성에 대해 미래를 보는 능력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지도 않고도 그곳에 미리 복음을 전했다. 선지적 사도성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미리 미래를 펼쳐보는 능력이다.


1장의 후반부는 인간의 적나라한 죄악들을 나열한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온갖 불의와 탐욕에 빠진 모습들이다. 가장 무서운 심판은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 두신다. 우리는 세상 살다가 잠시만 한 눈 팔아도 죄악의 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의 흐름대로 살지 않고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절대 진리임을 믿으며 나간다. 예수님과 세상이 충돌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이 답임을 믿고 정면돌파한다.


로마서를 읽기 시작하니 행복하다. 로마서를 읽고 나서 글을 쓴다. 로마서 관한 글을 한편씩 쓴다. 목사님이 로마서 강해를 하는데 나 스스로도 글을 써본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을 녹여서 나만의 글로 써본다. 나의 부르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잘하는 것이 별로 없다. 외모도 별로다. 그나마 흉측하지는 않다. 그나마 감사하다. 의인의 길은 주를 통해 온다. 영원한 생명도 주를 통해 온다. 그렇다면 부르심은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를 복음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부르심이라면 주변의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는 사랑이다. 부르심은 사랑이다.


그 부르심을 따라갈 때 조그마한 열매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글을 읽고 한 명이라도 감명받아 예수님을 믿는 기적을 간구해 본다. 글을 쓰며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는 사람들이 많아 지길 소망한다. 살다 보면 나태해지고 타락에 빠질 때도 있다. 그것을 잘 이겨내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성숙이다. 로마서를 읽으며 나태해지려고 하지 않는다. 로마서를 읽으며 내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로마서 1장은 복음의 능력과 함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어두워지는지를 경고한다. 나는 고(故) 이어령 선생님을 존경한다.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영성을 오가며 시대를 통찰했던 그분을 존경한다. 나 또한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물론 그분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지금 저에게 주신 또 다른 부르심이라 믿는다.


내 투박한 글을 읽고 단 한 사람이라도 감동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는 기적을 소망한다. 내 삶이 고백 교회(Confession Church)를 꿈꾼다.


살다 보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나태해진다. 로마서 1장 후반부에 나오는 죄악들의 유혹 앞에 서게 된다. 오늘 느낀 이 평안에 취해 안주하지 않는다.


날마다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주님 곁으로 나이 간다. 내 삶의 자리에서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이 평안은 주님이 주신 것이다. 로마서에 야릇한 향기가 난다.


<참고서적>

<루터의 로마서 주석>, 마르틴루터 지음, 박문재 옮김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지음


https://youtu.be/2ChIbcqcHq4?si=YDpLZHvSjsKyG_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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