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퇴근하고, 아침에 출근하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광고대행사를 다니면 야근은 당연시되는 것이었고 그 당시 나는 그게 정답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가족과의 관계도 너무 힘들었고 나는 기댈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많은 곳을 가면 간간히 식은땀이 나고 어지럽거나 숨이 막혔다. (심각한 불안장애였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무력감으로 하루하루 살아감이 재미가 없고 의미도 없었다. 내가 왜 살고 있는 것인가,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상념에 빠져 죽은 듯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굳이 살아갈 이유가 없다면, 살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나라는 존재하나 없다한들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뭐 내가 해보고 싶었던 거나 해보고 죽어야곘다.'
어휴, 지금 생각하면 중이병도 아니고 진짜.. 이불 킥
그 첫 번째로 오랜 버킷리스트였던 한라산 설산을 가보기로 했다. 언젠가 엄마가 해줬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라산 백록담에 오르며 우리 셋을 생각하고 오열을 하셨다고. 딱 마침 간간히 취미로 찍던 사진 동호회 사람들과 제주도 동백꽃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제주에서 하루를 더 보내며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다.
한라산 겨울 산행을 준비하는데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등산 초보였고 시간은 촉박했다.
급하게 등산 카페들을 마구잡이로 가입해 이것저것 정보를 찾았다. 다행히 가방, 스틱, 아이젠, 등산화, 스패츠까지 한 번에 렌탈 해주는 곳을 찾았고 그곳에 예약을 했다.
2020년 1월 16일 새벽 6시.
난 등산복도 한 벌 없었기 때문에 (어차피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딱히 사야 할 이유도 못 느꼈으며) 나이키 레깅스에, 그냥 운동할 때 입던 티셔츠 그리고 보드복 플리스를 입고 한라산 성판악에 도착했다.
깜깜한 어둠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차 싶었다. 어둠이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 날씨는 많이 춥지 않았고 휴대폰 불빛을 켰다. 성판악 산길은 초반에 편안한 숲 길로 그다지 힘들지 않은 오르막이었다. 중간중간 야트막한 나무 계단만 존재했고 야자 매트로 길은 푹신했다.
뒤에서 쫓아오던 노부부가 날 보고 놀랐다. 그 불빛으로는 먼 길 가지 못한다며 손에 들고 있던 랜턴으로 발 밑을 비춰주셨다. 위험하다며 두 분은 잠시 눈을 마주하시곤 내게 랜턴 하나를 내미셨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본인의 랜턴을 내어주다니. 잠시 당황했지만 거절했다. 감사하지만 괜찮다고 몇 번을 더 권하시더니 조심히 올라오라는 말과 함께 두 분은 나를 금세 앞질러 지나가셨다.
천천히 몸에 열은 오르고 숨은 가빠졌다. 지금이야 한라산 성판악 코스 그거 뭐 별거 아니지 하겠지만 그땐 어찌나 힘들던지. 조금 더 올라가니 어르신들이 아이젠을 차고 계셨다. 나도 잠시 숨을 고르며 아이젠을 착용했다. 발에 갑갑함이 몰려왔다.
'과연 내가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기왕 온 거 돌아갈 수는 없지.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곧게 뻗은 나무 숲 사이로 여명이 밝아오고 날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