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20년 2월, 나의 첫 발령 소식을 접했다. 드디어 불안정한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이다. 항상 어느 학교에 가더라도 내 학교, 동료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난 언젠가 떠나야 하는 사람이니 쉽게 소속감이나 동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정해진 기간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고, 그렇게 나는 겉돌며 지냈다.
첫 출근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바이러스가 많은 사람을 아프게 했다. 세상이 멈췄다. 누군가와 접촉하는 일이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했다. 학급비를 사용할 수 없던 때지만 빈 교실로 학생들을 맞이하고 싶지 않아 인디스쿨에서 여러 자료를 찾아 인쇄하고 코팅하여 교실 곳곳에 붙였다. 그리고 당시 인기 글에 있던 학기 초 학급 경영 팁들을 읽으며 학생들과의 첫 만남을 기다렸다. 기간제로 근무하던 시절 인디스쿨에 가입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개학이 미뤄졌다. 첫 출근 내가 느낀 학교는 적막했다. 긴장되고 설레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넓은 교실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게다가 당시 내가 속한 학년은 주로 3층에 있었는데, 내가 가장 마지막 반을 맡게 되어 4층에 있게 됐다. 일부러 3층에 가서 선배님들 교실에 서성거리는 것도 웃겨서 그냥 반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학교에 적응해 나갔다. 언젠간 학생들이 올 테니 그들을 조금 더 나은 상태로 맞이하고 싶어서 책도 보고, 인디스쿨도 자주 봤다. 책상 위치도 바꿔보고, 이미 청소를 여러 번 해서 먼지 하나 없던 교실을 괜히 한 번 더 닦았다.
바이러스는 내 마음을 모르는지 점점 심해졌고, 결국 담임으로서 나는 학생들을 온라인으로 처음 만났다. 대부분이 그랬겠지만 온라인 실시간 수업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담임으로서 학생들을 처음부터 맞이하여 수업을 한 건 처음이라 그랬는지 실수가 잦았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40분 수업이 끝나면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땀이 흐르는 줄도 모른 채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백 번 머릿속을 스쳤다. 출근하고 싶지 않은 날들이 늘어갔고, 학교에 가서도 대부분 시간을 멍때리며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다른 학년 부장님께서 교실 앞문을 두드리며 들어오셨다. 부장님께서는 집에서 가져온 토마토를 나에게도 나눠주고 싶으시다며 종이컵에 한가득 담아서 내게 주셨다. 보답할 게 없어 죄송하다는 나의 말에 그런 것을 기대하고 온 게 아니라며 나를 응원해주고 바로 떠나셨다.
그 부장님과 다퉜다. 물론 직접 다툰 것은 아니고 학년 대 학년으로 말이다. 등교 시 교과 수업 지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해 학년 간 논쟁이 있었다. 당시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주제에 쓸데없이 자존심 강하고 패기까지 넘치던 나는 어떻게든 1시간 더 교과 시수를 지원받겠다며 엑셀로 학년별 수업시수 대비 교과 지원 시수를 계산하며 맞서 싸웠다. 물론 우리 학년 부장님을 내세워서 말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 과거를 돌이켜보니 당시 내 학년 부장님도 못난 나를 만나 정말 고생 많으셨다.
다음 해에도 그 부장님과 다퉜다. 학기 도중에 군대에 가야 해서 교과 전담을 배정받은 나는 교과 교사와 담임 교사의 수업 시수를 비슷하게 맞춰달라고 주장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나는 정말 한심했다. 물론 이때도 교과 전담 교사들 중 특수 부장님을 내세워서 말이다.
약 2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와 학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학생이 있는 반을 맡게 되었다. 다른 선생님들을 통해 어떤 학생인지 소식을 듣긴 했지만 얼마나 문제가 될까 싶어 덜컥 맡았다. 그리고 개학 첫날 바로 후회했다. 그 학생은 개학 첫날 활동으로 만든 이름표를 찢어 교탁에 던졌고, 집에 가겠다며 가방을 챙겨 창문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소리쳤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학교에서 잘못했던 일들에 대한 벌을 받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학생을 잘 지도해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며 학교생활에 다시 익숙해지던 도중, 주변에 악성 민원이나 문제 학생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접했다. 내가 소속된 학교에서도 병가를 쓰고 쉬시는 분이 계셨다. 인디스쿨에는 학교생활이 힘들다는 선생님들의 글이 점점 늘어갔다. 어떤 시기에는 그런 글들을 보는 것이 힘들어서 수업 자료를 찾으러 인디스쿨에 들어가는 일조차 의식적으로 피했다.
방학을 앞둔 7월 19일, 서이초 선생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다음날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조퇴를 달고 서이초에 갔다. 담벼락을 둘러싼 줄 뒤에 서서 조문 순서를 기다렸다. 줄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어느새 교문 근처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 서 계시던 분들이 교문이 닫혀 조문이 불가하다고 말해주셨다. 그러면서 후문은 열려있는 것 같다고 그리로 가실 거라고 하셨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후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후문도 닫혀있었다. 알고 보니 누군가가 학교 안에서 조문하는 것을 막았다. 기다림은 계속되었고 결국 해가 저물 때쯤 학교에 들어가 조문할 수 있었다. 체육관 담벼락에는 선생님에게 보내는 말들이 가득했고, 그 앞에 서 있는 선생님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7월 21일, 서이초에 또 갔다. 이날은 전날과 다르게 몇몇 선생님들이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구석에 서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곳에 가보니 돌아가신 선생님의 교실이 있었고, 창가에는 ‘토토’라는 이름을 가진 선생님의 토마토 화분이 놓여있었다.
서이초에 다녀온 후 집회 추진 소식을 접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보신각에 갔다. 4구역에서 화면도 잘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1구역에서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구호를 힘차게 따라 외쳤다. 이후 열린 집회에도 참석하며 힘든 학교 현장이 변화하길 바랐다.
집회가 진행되고 사람들이 뜻이 모이던 중 우리의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잠시 멈추어야 한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처음엔 두려웠지만 계속 생각해보니 지금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학교 선생님들을 무작정 찾아가 설득하기 시작했다. 학교 단체 카톡방에 한 마디도 남기지 않던 나는 집회 영상을 공유하며 큰 뜻에 동참해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메시지를 남겼다.
운 좋게도 학교의 많은 선배님께서 취지에 공감해주셔서 뜻을 모았고, 마지막 한 분을 남겨두었다. 바로 그 부장님이다. 과거 힘든 시기에 부장님을 힘들게 했었기에 어쩌면 나는 내부의 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민했지만 그래도 말씀드리는 편이 좋겠다 싶어 얼굴을 뵙고 차분히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기우였다. 부장님은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다. 그리고 동참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9월 4일 병원에 다녀온 후 저녁에 서이초에 가는 길이었다. 문득 부장님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했다. 신규 교사가 이기적으로 구는 모습에도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돌아온 탕아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고 함께해주시는 그 마음이 궁금했다.
서이초에 도착해서 국화 한 송이를 들고 1-6 교실로 향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화분이었다. 햇빛도 잘 들지 않는 곳에 놓여 열매를 맺지 못한 저 화분의 심정은 어떨까. 이제는 마른 토마토 줄기만 남은 화분, 선생님의 토토를 보아하니 힘든 순간에 동료로서 힘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리고 나같은 사람 조차도 열매를 맺고 살아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나를 부끄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