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랜만에 시댁에 갔다. 혼자 계시는 아버님이 안쓰럽다며 남편이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 냉장고에 반찬이 하나도 없더라느니 하며 효자가 되었다. 우리부모님댁도 냉장고 열면 텅텅이라고 말을 해주었더니, 그래도 우리 아빠는 엄마가 같이 살고 있으니 괜찮을 거 아니냐고 한다. 서로의 집 사정을 대강은 알더라도 자세히는 모르니 저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엄마가 잠 자는 시간 빼고 10시간 이상을 남의 식당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바쁜 와중에 겨우 틈을 내서 반찬을 해두면, 아빠는 자기 입맛에 안 맞는다며 투정만 부린다. 볶는거, 튀기는 거를 엄마가 선호하고, 아빠는 된장에 버무린 것, 자작하게 된장에 지진 것 등을 선호한다. 자기가 선호하는 반찬은 예전에 할머니가 잘 해주더라면서, 정작 할머니의 마지막 12년동안은 찾아가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엄마가 힘들게 해준 반찬들을 '차가워서 못 먹겠다.'라고 하면서 한 냄비에 모두 털어넣고 끓여서 우리 남매에게 주기도 했다. 그 때는 정말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엄마가 맛있게 만들어준 반찬을 저렇게 한 군데에 넣고 끓일 것이면, 엄마가 굳이 힘들게 반찬을 할 필요가 없지 않나? 엄마에게 몇 번이나 말을 했다. 엄마가 힘들게 반찬 해놔도 아빠가 저렇게 한테 넣고 끓여서 주기 때문에, 굳이 힘들게 반찬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엄마는 '어떻게 반찬을 안 해놓을 수가 있겠냐.'라고 하면서 꾸역꾸역 반찬을 만들었다.
엄마는 그 꾸역꾸역함으로 지금껏 버터왔다. 지금도 조금 덜 일하고 나라의 복지혜택을 누리면 좋을텐데 굳이 꾸역꾸역 일하고 혜택의 사각지대에 머물러있다. 어렸을 때는 내가 알려주면 부모님이 바뀌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생각보다 매우 완강한 고집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옆에서 아무리 말을 해주어도 전혀 듣지 않는다. 아빠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무능한데 차량을 소유하고 있으며, 엄마는 여전히 식당에서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한다. 차량소유와 소득기준을 초과하는 보수 등이 발목을 잡는데도 여전히 반복한다. 그래서 나는 고향집을 생각하면 푸근하고 따뜻함 보다는, 구성원들의 답답한 행태로 인한 뜨뜨미적지근한 열감을 동반한 꼬릿한 감정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친정에 대한 생각은 거의 잊고 지냈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 시댁에 갔는데 뜬금없이 시아버지의 입에서 우리 아빠에 대한 질문이 나온 것이다.
"애들 외할어버지는 애들 봤니?"
무슨 의도가 있어서 질문한 것은 아니시겠지.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60넘은 노인의 호기심 차원에서였겠지. 아무리 자기 자식이 미워도 손자는 이뻐하겠지. 라는 타인이 가질 수 있는 아주 가벼운 호기심 정도였을 것이다. 그 질문을 받은 당사자인 자식으로서는 매우 당황스럽고 상처가 될 수도 있었지만, 노인은 그것까지는 고려하지 못한 듯 했다. 언젠가는 다시 고향에 갈 수 있겠지. 고향에 가서 부모님 집을 방문할 수 있겠지. 고사리같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건장한 사위의 옆 폭에 살짝 팔장을 끼고, 대문을 들어서면 부모님이 놀란듯이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반갑게 맞이해주겠지. 그런 막연한 상상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30여년간을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아빠가 그의 부모인 나의 조부모에게 받았던 푸대접을 생각해보면, 엄마는 몰라도 아빠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아주 지배적인 나의 느낌이고 생각이다.
외갓집의 외숙모도 그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을 강행했다. 그 말로의 결과를 지켜본 바, 외숙모의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외삼촌을 인정하지 않았고, 서로 왕래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 돌아가실 때가 되어서야 산자와 죽은자로서 겨우 만나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는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이며, 얼마든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아주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의 고착으로 비롯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본인 딸의 상태는 덮어두고, 그저 사윗감으로는 학벌, 인물, 직업, 집안 좋은 그런 유니콘을 찾아해맸다. 본인 딸이 결혼한다고 상대방을 데리고 오겠다는 데서 저런 멘트를 하는 것은 정상은 아니라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