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나라와 문화, 그리고 더 들여다보면 한 가족의 정체성을 포괄한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H마트에만 가면 운다
H마트, 한아름의 H를 따서 지은 미국의 대형 한인마트다. 미국답게 어마무시한 사이즈의 매장 속에, 한국 통조림, 라면 등 가공식품부터 미국에선 쉽게 구하기 어려운 다양한 식재료들이 가득한 "미국 속의 한국"과도 같은 곳이다. 그렇다보니 H마트에 가면, 미국 사회에 꼭꼭 숨어있던 한국 사람들을 다채롭게 만나볼 수 있다. 한국말은 한마디도 못하는 교포 아이들부터, 영어는 못하지만 십수년째 살아가는 할머니까지. H마트 속에는 미국 사회 속 한국인들의 다양한 군상이 존재한다.
미셸 오바마가 추천했고 무려 53주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른 "H마트에서 울다"를 지은 미셸 자우너는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다. 그녀는 어린시절 2년에 한번씩 찾던 서울에 대한 추억으로, 자신의 절반은 한국인이란 인식을 가지고 살아왔다. 어린시절 서울에서 맛본 할머니의 한국 음식과 거리 곳곳에서 즐기던 음식들은 그녀의 "한국인" 정체성을 더더욱 확실하게 성장시켰다.
친구처럼 편한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미셸 자우너는 콩이 잔뜩들어간 밥, 손가락을 쪽쪽 빨아먹는 간장게장의 맛을 통해 깊은 유대감을 형성해 나갔다. 교포, 혼혈 등 정체성이 흔들릴 가장 흔들릴 수 있는 유년기에, 그녀는 "한국의 맛"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스스로의 뿌리를 내려나갔다.
엄마없이 잠도 못자던 아이가 엄마의 손끝도 못견디는 십 대로 변하다
하지만 이런 미셸 자우너도, 사춘기의 폭풍을 피해가진 못했다. 친구처럼 편안했던, 하루도 떨어지기 싫었던 엄마는 어느새 그녀의 삶에 지독하게 간섭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녀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것과 같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이 모든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미셸 자우너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으로 떠난다.
미셸 자우너는 록밴드를 하고, 글을 쓰면서 가난한 예술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지독한 사춘기를 겪은 그녀답게, 이러한 삶은 어머니가 극도로 반대하던 삶이기도 했다. 그녀는 1년에 한 두번씩만 집을 방문하며, 철저하게 가족, 그리고 어머니와 거리를 뒀다. 그리고 자우너가 25살이 되던 해, 그녀의 어머니는 편평상피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부터는 우리집이 꼭 우리에게 등을 돌린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의 말기 암 판정을 듣고, 미셸 자우너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반항하고, 무심하게 굴던 지난 날을 반성하듯 어머니에게 그녀의 시간을 쏟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고 그녀는 어머니를 멀리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담담하게 장례를 마무리하고, 아버지와 함께 미친듯이 식사를 하던 그녀는 갑자기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무심하게 흘려보낸 지난날을 후회하듯, 그녀는 한동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어머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집은, 마치 그간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스스로의 실패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순간, 미셸은 어머니가 투병중에 유일하게 먹을 수 있던 '잣죽'이 먹고싶다고 생각했다.
고소하고 뜨끈한 잣죽은 슬픔으로 지쳐있던 그녀에게 알 수 없는 편안함을 주었다. 죽 한그릇을 비우고, 아삭한 김치로 입가심을 끝냈을땐 묘한 쾌감도 느끼지 않았을까- 어머니가 투병중에 유일하게 먹을 수 있던 음식은, 슬픔의 수렁에 빠져있던 딸을 현실로 다시 인도했다. 미셸은 잣죽을 맛본 후,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분주하게 한국 음식을 만들어보고 먹어보았다. 그녀에게 한국의 맛은, 어린시절 함께 했던 어머니를 추억할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가 된 것이다.
음식을 만들고, 어머니를 추억하며 미셸 자우너는 한층 성숙해지고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한식을 만들기 위해 H마트에 갈 때마다 어머니 생각에 울던 스스로를 떠올리며, 글을 쓰기로 마음 먹는다. 그렇게 "H마트에서 울다"가 탄생했다.
어머니를 보내고 그녀가 그러했든, "H마트에서 울다"는 담담하지만 깊은 감정선을 담아 스스로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교포, 혼혈이 아니어도 모두가 느껴왔을 성장통을 응축해서 담아낸 느낌도 든다. 그리고 이 포스팅에서도 몇번 레퍼런스로 넣어둔것처럼, 직관적으로 모두의 마음을 울릴법한 표현력을 쏟아내기도 한다.
많은 생각이 드는 책이다. 특히, 어린시절부터 세세하게 자신의 기억을 서술해나가는 미셸 자우너만의 글의 흐름이 몰입도를 상당히 높혀준다.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지만 담백하고 응축된 표현력으로 감정을 전달해내는 그녀의 글솜씨가 더더욱 생각과 감정을 증폭시키는 책이다.
추운 겨울, 한번쯤 읽어보며 마음과 생각을 데워보는건 어떨까 싶은 책.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