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를 목전에 둔 30대 직장인의 이야기
무엇보다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나는, 느끼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서 살아 왔으며 이는, 그 자체로 크나큰 특권이자 모험이었습니다. - 고맙습니다(Gratitude), 올리버 색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일을 하다가, 느즈막히 군대에 갔다. 이제 갓 시작한 사회생활이 머지 않은 미래에 끝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남들보다 늦게 군인이 되어야한다는건 나에겐 큰 부담이자 압박이었다. 그래서인지 친구들과 술에 만취해보기도 하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때까지 달리며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술은 찰나의 망각만 나에게 허락했고, 달리기는 체력이 바닥나고 난 후의 허무함을 줬다. 그래서 돌고 돌아, 나는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는 책에 내 정신을 맡겼다. 이야기의 흐름에 의식을 맡기듯, 한국 근대소설부터 최근 베스트셀러까지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렇게 무언가에 홀린듯 책을 읽다가 만난 책이 올리버 색스의 "고맙습니다(Gratitude)"였다.
오히려 나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더없이 강렬하게 느끼고 있다. 남은 시간 동안 우정을 더욱 다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글을 좀 더 쓰고, 그럴 힘이 있다면 여행도 하고, 새로운 수준의 이해와 통찰을 얻기를 희망하고 기대한다
올리버 색스는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고 불리는, 의사이지만 작가로서의 성공이 돋보이는 독특한 커리어의 인물이다. 수많은 저서를 통해 그의 전문 분야인 뇌과학과 신경학을 독자들에게 설명해냈기에, 그는 영미권에선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인물이다.
내가 읽었던 "고맙습니다"라는 책은, 그가 암의 전이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쓴 마지막 자서전이다. 그는 동성애자로서 겪었던 아픔과 방황을 글로 승화시켰던 뇌과학 전문가답게, 자신의 죽음을 매우 담담하고 아름답게 글로 담아냈다. 그는 허락된 남은 시간의 절대적인 양에 대한 아쉬움을 표출하기보단, 남은 기간동안 우정과 사랑을 다지고싶다는 삶을 초월한듯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2년도 안되는 군대가는게 억울해 일탈 아닌 일탈을 하던 나에게, 올리버 색스의 죽음을 앞둔 태도는 큰 경종을 주었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종교인도 가지기 힘들 삶에 대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걸까?
인생을 주기율표로 비유한 작가이자 의사
올리버 색스는 주기율표를 좋아, 아니 사랑했다. 그는 인간의 일생이 주기율표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26살의 사람은 원소번호 26번처럼 철처럼 흔한 원석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든을 목전에 둔 79살이 되면, 그 인생의 흐름에 따라 원소번호 79번인 금처럼 변하기도 한다.
색스 자신은 82번의 납의 단계에서 삶을 마무리했고, 그가 이것을 원소의 어떤 성향으로 비유할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26살에 근접해있던, 방황하고 있던 나에겐 그의 비유가 매우 크게 마음에 와닿았다. 맞다, 나는 철처럼 흔한 원석에 불과한 내 인생을 철저히 제련하고,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젊은이었다. 군대는 어찌보면 당연히 맞이해야할 제련의 과정이고, 내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모든게 금처럼 변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뭔가 마음을 내려놓고 하루하루에 더 충실한 삶을 살았던것 같다. 압박이 가득했던 군대에 대한 걱정은 잠시 미뤄두고, 전역 후 나의 미래에 대해 좀 더 고민하고 계획을 세워야겠단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마음만 먹고 현실의 유혹에 흔들린적이 더 많은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닮지는 못했지만, 동기부여를 준 그를 기억하며
"고맙습니다(Gratitude)"를 읽은지도 6년 이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는 그렇게 압박을 받던 군대를 전역하고, 취업과 이직에도 성공했다. 성공적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솔직히 대답하긴 어렵다. 하지만, 군대 하나에 크게 흔들리던 시절과 달리, 나는 이제 어느정도의 사회적 혹한과 바람은 버텨낼 수 있는 단단함을 가지게 된것 같다.
문득 내 나이인 34살에 있는 원소를 확인했다. 주기율표 34번에 위치한, 브로민이란 원소다. 낯설고 생소해서 검색해보니, 80번인 수은과 함께 상온에서 유일하게 액체로 존재하는 원소란다. 굳이 끼워 맞추자면, 사회에 익숙해져서 액체처럼 유연해진 내 모습과 어느정도 닮아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올리버 색스가 주기율표를 인생의 지표로 삼았듯, 나도 나만의 지표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가 많이 옆길로 샜지만, 크리스마스 당일에 글을 발행하며 하고싶은 말은 하나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오늘도 헛소리 가득한 브런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