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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용한가 - 4

그냥 써보는, 직장인 이무용의 이야기

by wordsbyme

무용은 전화를 끊고 힘없이 소파에 드러눕듯 앉았다. 악착같이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해와서, 학자금 대출도 받아본적 없는 무용에게 "대출"이란 단어는 낯설고 무서웠다. 두려움도 잠시, 무용은 이제 월급 세번 받은 신입사원에게 은행이 대출을 해줄지 불안해진다.


집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건 무용도 알고 있었다. 한참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무용은 안방 문 너머에서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는 통화를 어렴풋이 듣곤 했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온 어머니는 갑자기 신용카드 배달 일을 시작했다. 벽 한면을 가득 채웠던 책들은, 어느새 하나, 둘 중고거래로 사라져갔다.


이따금 무용은 부모님께 집의 사정이 어떤지, 얼마나 힘든건지 묻곤 했다. 부모님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너는 알 것 없다, 할 거 해라." 그러나 그 말이 오히려 무용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절박해진 무용은 "대기업 취업"이라는 목표 하나만을 보고 달렸다. 성취감을 느낄 새도 없이, 어머니의 전화 한통은 무용이 잠시 잊고있던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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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무용은 오랫만에 지하철에 몸을 싣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무용은 희미하게 사회생활 미소를 장착하고, 김훈기에게 인사한다. 김훈기가 무테 안경 너머로 무요을 살짝 보며 말한다.

"어 무용, 연수 1등하고 온거 맞지? 아니면 너 이따 혼날줄 알어."


농담인걸 알지만, 밤새 잠을 설친 무용은 웃지 못한다. 퀭한 무용을 보며 김훈기는 '얘는 진짜 애가 재미가 없어'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다. 무용은 종수, 동수, 미주에게 차례로 인사하고 자리에 앉는다.


오랫만에 돌아온 사무실, 훈기와 종수는 무용이 오길 기다린 것처럼 많은 업무지시를 내렸다. 이제 연수도 끝났으니, 이제 신입티를 벗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당장 야근을 해도 모자랄 업무량이었지만, 무용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쌓여있는 문서와 끊임없이 울리는 메일 알림에 무용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나 머릿속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대출이 승인되지 않으면 어쩌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결국 무용은 자리를 박차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무용은 한동안 애써 끊어보려 애쓰던 담배를 입에 문다. 은행 어플과 검색 앱을 한참을 뒤적거리는 무용. 아직 1년도 안된 무용에게 대출은 쉽지 않아보인다. 연달아 담배 두대를 태운 무용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쉰다. 저 멀리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즐거운듯 이야기하는 다른 직원들. 무용은 괜히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행복한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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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시간, 무용은 병원에 간다는 핑계로 훈기와의 점심에서 벗어났다.
은행 창구 앞, 번호표를 손에 쥔 무용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직원들의 친절한 미소가 오히려 위축되게 느껴졌다. 상담사는 친절히 서류를 확인했지만, 무용은 말끝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월급 통장을 만들었던 은행 창구에서, 무용은 대출 상담을 받는다. 미리 알아보고 준비한 재직증명서와 지난 월급수령 내역을 제출하고, 대출 가능한 금액을 확인한다.


알 수 없는 말들이 가득한 대출서류를 몇번이고 찬찬히 읽는 무용. 대출 목적을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생활비' 칸에 체크한다. 대출 심사에는 일주일 정도가 소요되고, 회사 번호로 확인 전화가 갈 수 있다는 안내를 해주는 은행 직원. 무용은 서류들을 주섬주섬 챙겨 은행을 나온다.


어느새 점심시간은 10분도 남지 않았다. 무용은 회사 앞에서, 다시금 담배를 꺼내문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온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떨리고, 답답한 마음을 날려보겠다며 담배를 태워본다.


퇴근길, 무용은 잘 타지 않던 버스에 몸을 싣는다. 창가에 앉아 멍하니 가던 그 때, 핸드폰이 진동하며 낯익은 이름이 떴다.

문기엽. 중학교때부터 10년 넘게 친하게 지낸 친구. 이어폰을 꽂고 전화를 받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술 한잔하자. 대기업갔다고 소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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