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써보는, 직장인 이무용 이야기
문기엽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무용과 함께한 친구다. 그는 무용의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야근에 시달리면서도 친구들의 호출에는 언제나 작은 경차를 몰고 달려왔다. 그리고 아무리 피곤해도 술잔을 채워주며, 이야기를 들어줬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무용은 기엽이 친구들을 위해 얼마나 자신의 시간을 희생했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하루 종일 피곤에 찌들었어도 친구들 곁에서는 웃음을 잃지 않던 기엽의 모습이 이제는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세상 모든 걱정을 짊어진 듯한 마음으로 무용은 기엽이 있는 동네 작은 호프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십 번은 왔던 곳. 늘 같은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기엽은, 오늘도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엔 그가 좋아하는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여! 대기업 연봉 1억! 왤케 늦냐!"
기엽이 손을 번쩍 들며 익숙한 웃음소리로 무용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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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엽의 어린 시절 꿈은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였다. 하지만 현실과 타협하며 그 꿈을 접은 지 오래다. 그래도 가끔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댄스곡을 열창하며 그 시절의 흔적을 보여주곤 했다. 물론, 이제는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공부와 친하지 않았던 기엽은 대학에 진학했지만 전공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퇴했다. 이후 군대를 일찌감치 마치고, 돈을 벌겠다며 다단계에 발을 들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허황된 꿈임을 깨닫고 손을 뗐다. 그러다 그의 삼촌이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 들어가면서 새롭게 시작했다.
"바닥부터 시작해야지."
삼촌의 말을 되새기며 그는 영업사원으로 거래처를 찾아다니고, 작은 경차 안에서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낮에는 명함을 돌리고 밤에는 거래처의 또래 직원들과 술을 기울이며 영업을 이어갔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상품을 팔기 위해 매일 설득과 거절을 반복하며 버텨냈다.
몇 년이 지나며 그는 회사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20대 후반, 과장이라는 타이틀도 얻게 됐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있었다. 하나, 둘 취업하는 친구들을 기엽은 진심으로 축하해 줬지만, 한참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한 스스로가 그만큼 잘하고 있는 것일지 되묻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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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이미 소주를 몇 잔은 비운 듯한 기엽. 무용은 앉자마자 괜히 툴툴대며 소주병을 들어 기엽의 빈 잔을 채워준다.
"야, 1억은 개뿔. 놀리냐?"
평소 같으면 자기가 만난 대기업 사람들은 다 돈 잘 번다느니, 보너스가 몇 천이라느니 말을 늘어놓을 기엽. 하지만 오늘은 그냥 피식 웃으며 무용의 잔에 조용히 술을 따른다. 무용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조용히 잔을 들어 짠을 한다.
"뭔 일 있냐? 청승 떠는 게 심상치 않은데" 무용이 김치찌개를 한숟가락 먹으며 묻는다.
"일은 무슨, 나 청승떠는거 하루 이틀 보냐?" 기엽이 기본 안주로 나온 과자를 우물거리며 대답한다.
몇 번을 캐묻자, 기엽은 못 이기는 척 고민을 말한다. 삼촌 아들이 회사에 들어왔단다.
"피는 물보다 겁나 진하대잖냐. 삼촌도 그렇고, 거래처 사람들도 사장 아들이라니까 더 잘해주는 거 같고.
이러다 이도저도 아니게 회사 지키다가, 아무것도 안될 거 같다." 기엽이 취기가 올랐는지 한껏 붉어진 얼굴로 넋두리를 한다.
"지난달에 내가 땄다는 거래처 있잖아, 거기도 요즘 삼촌 아들만 찾더라. 내가 먼저 다 깔아놓은 자리였는데, 아들 이름값이 더 먹히는 거지."
"야, 그래도 니가 20대를 다 쏟았는데. 삼촌도 그 정돈 알고 계시지 않겠냐." 무용이 답한다.
"그래, 알지. 근데 여기서 더 해도 티가 날까 싶다. 요즘 자동차 딜러 핫하다는데 그거나 해볼까?" 기엽이 피식 웃으며 답한다. 무용은 혀를 끌끌 차며 남은 소주를 기엽의 잔에 따라준다.
"자동차 딜러는 아무나 하냐. 됐고, 잔 비우고 노래방이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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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깨어나 까만 밤과 함께! 다 들어왔다면 누구 차례!” ”내가 말했잖아! 다시 돌아온다고!”
기엽의 목소리가 한껏 올라갔다. 가사를 읊조릴 때마다 눈빛이 반짝였고, 마이크를 꽉 쥔 손은 떨리는 듯했다. 무용은 옆에서 박자를 맞추며 호응했지만, 기엽의 얼굴에 스치는 씁쓸한 미소를 보자 마음이 묘하게 무거워졌다.
기엽은 마이크를 잡고 오래된 댄스곡을 열창했다. 무용이 옆에서 열심히 호응주는 와중에, 기엽은 가끔씩 눈을 감으며 무대 위를 상상하는 듯했다. 오랜 꿈을 뒤로하고 남들보다 빠르게 사회를 마주한 기엽은, 노래방만오면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이루지 못한 꿈을 펼치는 것처럼.
목이 쉴 정도로 질러댄 무용과 기엽이 노래방을 나왔을 땐, 이미 12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왠지 아쉬운 무용과 기엽은 편의점에서 맥주와 새우깡을 사서 공원 벤치로 향한다.
"야, 나 오늘 대출 신청했다." 맥주를 한모금 들이키고 무용이 말한다.
기엽은 별 말 없이, 맥주를 홀짝이며 무용의 이야기를 듣는다.
"야 무용아, 다 좋은데" 무용의 이야기를 다 들은 기엽이 한번 숨을 고르고 말한다.
"난 니가 좀 너를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