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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용한가 - 6

그냥 써보는, 직장인 이무용 이야기

by wordsbyme

무용의 한 주는 정신없이 흘러갔다. 연수 전 준비했던 큐린 리뉴얼 안은 이제 본격적으로 실행 단계에 들어섰고, 무용은 하루 종일 자료를 정리하며 김훈기와 이종수를 번갈아 만났다. 원래 김동수가 담당하던 팀 취합 업무도 고스란히 인수인계받은 무용에게, 하루는 길면서도 짧았다.


여느 날처럼, 통근버스를 타고 남들보다 일찍 출근한 무용. 습관처럼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켜고, 커피 한 잔을 손에 쥔 순간, 책상 위 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이무용씨죠? 순향은행입니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용의 손이 순간 굳었다.

"대출 심사 통과하셨습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무용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
"네, 감사합니다." 기계적으로 대답한 뒤 전화를 끊은 무용은 한참 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통장을 열어봐야 할지, 아니면 그냥 잊어버려야 할지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무용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모니터를보며 일상으로 돌아가려 애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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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주간회의 자료를 준비해 떠난 무용의 책상. 주인 없는 무용의 핸드폰은 끊임없이 울리고 있다.

김훈기에게 영혼까지 다 털리고 돌아온 무용은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한다


"부재중 전화, 10"


깊은 한숨을 쉬고, 무용은 같이 회의에서 돌아온 이종수에게 말한다.


"파트장님, 저 잠깐 은행 좀 다녀와도 될까요?"


회사 지하에 있는 ATM 기계에서, 무용은 평생 처음보는 금액을 확인한다.

그리고 스마트폰 잠금을 해제하고, 30분 전 남겨진 메세지를 확인한다.


'무용아, 대출 승인나면 송금 부탁한다."


잠시간 망설이던 무용은, 대출금액 전액을 아버지에게 송금한다.

부탁은 어머니에게 받았지만, 송금은 아버지에게 하는 상황. 마음이 복잡하다.


순간 무용의 머릿속에 어린 시절 추억들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외동아들인 무용을 본인의 방식대로 아꼈다. 다만, 그게 너무 서툴렀다.


무용은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던 순간, 아버지의 손길을 떠올렸다.
어설픈 손길 덕에 덕분에 넘어지고 멍들기 일쑤였지만, 그때마다 '괜찮아, 다시 해보자'며 손을 내밀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오묘한 감정을 마음 속 가득 담은채, 무용은 평소 안하던 줄담배를 피고 사무실로 올라간다.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퍼져가며, 무용은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듯했다.
'다 잘 될 거야,'라는 상투적인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봤지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입사 후 처음으로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고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무용은 괜시리 자리를 오래 비운것 같아 움츠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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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같던 하루를 마친 무용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이런 저런 시위로 길이 잔뜩 막히는 서울의 중심가, 무용은 알지 못하는 정치적 이슈에 퇴근이 늦어지는게 야속하다. 가뜩이나 야근해서 주린 배는, 눈치도 없이 계속 꼬르륵 거린다.


30분을 기다리고 버스를 탄 무용. 집에 들어갈 자신이 없다.

무용은 그저 오늘 하루가 무거운 기억으로 남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메시지를 보내본다.

'야, 오늘 술 먹을 사람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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