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써보는, 직장인 이무용 이야기
한동안 무용은 퇴근 후 친구들과, 때론 혼자 술을 마셨다. 회사에서는 큐린 리뉴얼 프로젝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무용의 머릿속은 계속 어수선했다. 김훈기의 날 선 지적에 움츠러들기 일쑤였고, 정신없이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무용은 자꾸만 실수를 반복했다. 그래도 이종수의 도움으로 큐린 리뉴얼 디자인은 내부 승인을 받았다. 이제 실행만 남았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무용씨, 이거 제대로 검토한 거 맞아요?"
이종수의 목소리가 파티션 너머에서 들려왔다. 무겁고 날카로운 목소리.
"이거 숫자가 하나도 안 맞는데, 나보고 뭘 보라는 거예요?"
무용은 굳은 표정으로 이종수의 자리로 다가갔다. 화면 속 파일은 무용이 직접 정리했던 자료였다. 그는 익숙한 셀과 숫자를 훑어보며 찬찬히 살폈다. 틀린 데이터를 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판매량 예측 수치가 크게 어긋나 있었다.
큐린 리뉴얼 프로젝트는 정해진 일정에 따라 기존 병과 라벨 등 부자재 수량을 파악하고, 발주 중단을 요청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무용이 제출한 자료는 유관부서와의 협의를 위한 핵심 문서였다. 정확하지 않은 예측치는 생산과 유통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거 지금 다 넘어간 거예요? 재고 없어서 못 팔면 매출은 어쩌려고요?"
이종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용은 자신이 실수한 파일을 바로잡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손끝이 떨렸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수정해서 다시 드리겠습니다."
무용의 목소리는 낮고 빠르게 가라앉았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유관부서에 전화를 돌리고, 메일을 보내며 급한 불은 껐다. 하지만 무용은 한참을 본인을 자책하며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이종수는 별말 없이 퇴근했고, 이미주는 잘 해결된 거니 너무 마음 쓰지 말라는 말과 함께 떠났다.
한참을 리뉴얼 전체 플랜과 매출, 재고 데이터를 재확인한 무용은 10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무용은 이종수와 SCM, 구매, 자재팀이 모두 포함된 회의에 참석했다. 기존 전달한 데이터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업무상 혼선이 생긴 부분을 사과했다.
어제 그렇게 화를 냈던 이종수가 회의가 끝날 무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미리 확인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무용씨가 고생 많으셨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이종수가 무용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무용씨, 막걸리 먹을 줄 알아요?'
예상치 못한 물음에 무용은 잠시 멈칫했지만, 좋아한다고 답한다.
'좋아. 오늘 저녁에 같이 한잔하면서 이야기 좀 해요.'
그들이 향한 곳은 종로의 구석진 골목에 자리한 막걸리와 파전으로 유명한 이종수의 단골집이었다.
허름하지만 정겨운 분위기 속에서, 제법 서먹한 두 사람은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한잔, 두 잔, 대화 없이 술만 주고받던 둘 사이의 적막을 깬 건 종수였다.
"무용 씨, 일 해보니까 어때?" 이종수가 물었다.
무용은 잔을 비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힘들지만, 파트장님이 도와주셔서 괜찮습니다."
이종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입에 발린 소리도 할 줄 아네. 힘들 거야, 팀장님이랑 나, 같이 일하기 쉽지 않거든"
이종수는 무용이 알지 못했던 회사 이야기를 차근히 설명해 줬다. 입사 후 영업과 재무팀을 거쳐 마케팅 팀으로 오게 된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김훈기와 일 외적으로도 얼마나 믿고 의지하는 사이인지.
"솔직히 우리 팀장님, 훈기형 요즘 많이 불안해 보인다" 종수가 살짝 취기 오른 목소리로 말한다.
"매출도 썩 안 좋고, 위에서도 그다지 신뢰하는 거 같진 않고. 그러니 우리가 잘해야 되는 거지."
어느새 막걸리 세 통을 비운 둘. 종수는 계산하고 무용에게 택시 타고 가라며 2만 원을 쥐어주고 떠난다.
무섭기만 했던 이종수가, 조금은 편해진 무용은 택시 대신 버스를 탄다.
오늘 이종수와의 술자리는 무용에게 작은 위로이자 큰 다짐이 되었다.
실수할 때마다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걸 배웠다.
회사 생활은 어쩌면 이런 식으로 조금씩 단단해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