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써보는, 직장인 이무용 이야기
이종수가 술자리에서 말한 것처럼, 김훈기는 쉽지 않은 상사였다.
그는 A부터 Z까지 모두 본인의 컨펌 후 진행되길 바랐고, 항상 부하 직원을 테스트하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
점심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팀원이 함께 점심을 먹길 바랐다.
하지만 팀원들은 훈기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동수는 동기와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미주는 운동을 하러 간다며 점심을 빠져나갔다.
그나마 함께 하던 종수도, 영어 학원을 다닌다며 빠져나가던 무렵 - 이무용이 입사했다.
한참 정신없던 5월, 주간회의 때 김훈기가 회식을 공지했다.
회식 장소는 노량진, 단 한 명도 불참자가 없어야 한다고 훈기는 으름장을 놨다.
칼 같이 퇴근 시간에 맞추어 노량진으로 떠나는 SL인터내셔널 마케팅 1팀. 지하철에서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회식이 몇 시쯤 끝날지 불안해한다. 노량진에서, 무용은 미리 예약해 둔 회를 픽업해 상차림이 된 식당으로 들어간다.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는 훈기. 갑자기 팀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오늘이 무슨 날 이게?”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김훈기가 특유의 옅은 미소를 지으며 신나게 말했다.
”내 입사 15주년이다! 그러니까 소주 15병을 마실 때까지 아무도 집에 못 간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던 말이 진심임을 알게 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훈기는 유독 신이 나서 주도적으로 잔을 돌렸고, 팀원들은 억지로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무용은 이미 두 잔 만에 속이 쓰리기 시작했지만, 김훈기의 "한 잔 더"라는 말에 주저할 틈이 없었다.
옆자리의 이종수가 훈기의 술 돌리는 속도를 낮춰주지 않았다면,
진짜 누구 하난 술독에 올라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얘들안, 니들도 진짜 열심히 해야 된다?" 김훈기가 잔뜩 취기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훈기는 신나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풀었다. 본인이 파트장이 되던 날, 새로 출시한 제품이 대박이 났던 순간 등등...
무용은 슬슬 내일 출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며 팀원들은 비틀거리며 소주병을 세었다.
결국 15병을 모두 비운 뒤에야 김훈기는 반쯤 혀가 풀린 발음으로 말했다.
"오늘 다들 즐거웠지? 이제 가자"
무용은 집 방향이 같다는 이유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훈기와 같이 택시에 탔다.
뒷자리에서 코 골며 잠든 훈기를 백미러로 보며, 무용은 한숨을 쉬었다.
집 근처에 도착하자, 훈기는 택시비를 결제하고 무용도 여기서 내리라며 고집을 부렸다.
조금 더 가야 하는 무용의 집까지, 택시를 태워 보내는 게 아깝다나.
훈기의 성화에 무용은 결국 택시에서 내리고, 버스도 없는 새벽 2시에 한참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
잠시 눈을 붙였다 일어나니 출근시간.
씻는 내내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독한 숙취에 고생한 무용은
편의점 숙취해소제 하나로 속을 달래며 회사에 도착했다.
무용을 시작으로 하나, 둘, 도착하는 팀원들.
항상 해맑은 미소가 장착되어 있던 이미주마저, 오늘은 생기 없이 퀭해 보인다.
그리고 이 날, 김훈기는 오전 반차를 썼다.
“여보, 오늘 출근 안 해요? 술을 뭐 그렇게 많이 먹었대?”
아내의 목소리에 김훈기는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이미 오전 8시가 넘었다.
아직도 짙은 술냄새가 나는 한숨을 쉬며, 훈기는 사내 메신저에 로그인해 반차를 올린다.
그리고 팀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긴다.
‘나 오늘 오전 반차니까, 급한 건 오후에 이야기하자.’
침대에서 나오니, 아이들은 이미 학교에 갔다.
오늘 학부모 모임이 있다는 훈기의 아내도 분주히 나갈 채비를 한다.
“밥 차려놨으니까 알아서 먹어요”
잘 차려진 밥상 위, 뜨끈한 미역국만 벌컥벌컥 들이켠 후
훈기는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스마트폰을 들고 주식 어플을 켜본다.
매일 열어봐야 비슷한 숫자, 옅은 한숨을 쉬고 눈을 감는다.
SL그룹에 처음 입사했을 때, 김훈기는 제법 인정받는 유능한 사원이었다.
자신이 맡은 일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있었고,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어떻게든 가져올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을 만들어오고,
거의 매일같이 있던 상사들의 술자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던 훈기는 동기들보다 빠르게 승진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는 “SL 인터내셔널 최연소 팀장”이란 타이틀까지 달았다.
팀장이 된 첫날을 훈기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팀장님 안녕하세요”라는 말은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보다 본인이 훨씬 앞서있다는 사실,
그리고 조금만 있으면 대기업 임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최연소 팀장이란 타이틀은 금세 다른 후배가 가로채갔고, 인사 시즌에 훈기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훈기는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지난 10년간 4팀을 거치며 버티고, 또 버텼다.
SL그룹을 퇴사해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동기가 뉴스 인터뷰 하는 걸 본 날,
훈기는 소주 한잔으로 쓰린 속을 달랬다.
'분명 나보다 뒤처져있던 놈인데....'
SL그룹 같은 대기업에서 버티지 못해 도망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밖에 나가 승승장구하고, 좋은 옷을 입고, 인터뷰까지 하는 걸 보니 속이 상했다.
어느새 훈기는 입사 15년 차 팀장이 되었다.
같이 입사했던 동기들은 대부분 이직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예전엔 그래도 같이 밥 먹을 동기가 있다는 게 좋았는데, 이제는 아무도 없다.
점심시간이 되면 훈기는 신입 무용을 찾는다.
한때 훈기의 점심 친구였던 종수는, 이제 머리가 좀 컸다고 점심만 되면 공부를 하겠다며 도망친다.
약삭빠른 동수는 눈치껏 슬쩍 빠지고, 여자사원인 미주는 왠지 부담스럽다.
재미는 없지만, 자기가 무슨 말을 떠들어도 가만히 있는 무용은 훈기에게 나쁘지 않은 점심 친구다.
점심시간즈음 출근한 김훈기는 도착하자마자 무용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무용아, 오늘은 추어탕 어때? 해장은 추어탕이다."
식당에서 추어탕이 나오고, 훈기는 전날 회식에서 신나게 풀던 추억을 다시금 말해본다.
"무용아, 네 나이 땐 뭐든 재밌어야 해. 나도 네 나이 땐 이 바닥 꽤 잘 나갔었거든."
훈기는 한참을 과거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신이 처리했던 큰 프로젝트, 해외 출장이 잦았던 때, 그리고 상사의 인정을 받았던 순간들.
무용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추어탕을 후루룩 먹는다.
한참 말하느라 밥도 못 먹은 훈기가 말을 덧붙인다.
"그러니까, 너는 재밌게 살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일에 대한 답을 네 스스로 내리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