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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용한가 - 9

그냥 써보는, 직장인 이무용 이야기

by wordsbyme

어느새 무용이 입사한 지 7개월이 넘었다. 잔뜩 긴장해 있던 무용의 어깨는, 이제 짐을 가득 짊어진 가장의 어깨처럼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준비 중인 "큐린 리뉴얼" 프로젝트가 얼른 마무리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연구소에서 새로운 처방을 받아보고, 시음을 거쳐 피드백을 주고받는 데만 꼬박 3개월이 걸렸다. 마침내 SL 인터내셔널 마케팅 1팀은 새로운 큐린의 맛과 방향성을 확정지었다. 이어 새로운 마케팅 슬로건을 정하고, FGI(Focus Group Interview)를 몇 차례 진행하며 디자인까지 완성했다.


시험 생산된 공병에 담긴 새로운 큐린을 받아 든 순간, 무용은 문득 출산의 고통이 이런 걸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시생산 제품은 아무 문제 없었고, 무용은 종수의 도움을 받아 본생산을 준비한다.




생산 과정에서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리뉴얼된 큐린은 무사히 생산되었다. 무용은 본생산된 제품 박스를 양 손에 안고, 유관부서에 제품을 돌린다. 새로 생산된 제품을 돌리는건, SL인터네셔널의 오랜 관례다.


"무용씨, 고생 진짜 많았어요"

다른 팀 사람들이 건내는 말에 무용은 괜시리 어깨가 으쓱해진다. 칭찬에 인색하던 김훈기도, 차가운 이종수도 고생했다며 무용의 어깨를 툭툭 쳐준다.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낸 제품이건만, 이 순간만큼은 무용에겐 모든 큐린 제품이 자식처럼 애틋하게 느껴진다.


리뉴얼 출시 후 한 달, 큐린의 실적은 썩 좋지 못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큐린이 리뉴얼 됬다는걸 소비자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출시 후 2주가 지났음에도, 소비자 반응은 미비했다. 이미주의 도움을 받아 추가적인 PR, 소셜 푸시를 진행했지만, 반응은 미비했다.


무용은 매일 아침, 출근길이 지옥같았다. 미비한 큐린의 매출 움직임, 그리고 매번 대안을 요구하는 훈기, 쌓여가는 재고... 출시 한달 후, 리뉴얼 된 큐린은 목표 매출의 70% 수준밖에 달성하지 못했다.


주간회의실. 김훈기는 미비한 매출 실적 그래프를 노려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결과물이 이거라면,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대답 좀 해봐.
무용, 큐린 리뉴얼, 정말 제대로 한 거 맞아?"


김훈기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이미주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고, 동수는 노트북 화면만 쳐다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용은 결국 입을 열었다.


"소비자가 리뉴얼된 큐린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홍보나 디자인 측면에서 더 보완할 부분 찾아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훈기는 차가운 시선으로 무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리미리 준비되었어야 하는거 아냐? 빨리 대안 가져와."


회의가 끝난 뒤, 무용은 사무실에 남아 고민에 빠졌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다음 날, 무용은 회사 근처의 편의점을 찾았다.
큐린이 진열된 음료 코너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눈에 띄게 진열된 다른 에너지 음료들과 달리, 큐린은 구석진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는 편의점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큐린이 잘 팔리나요?"


직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손님들이 잘 찾진 않는 것 같아요.
디자인이 바뀌었나 싶긴 한데, 뭐가 바뀐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무용은 다시 한번 큐린을 들여다보았다.
디자인이 깔끔해진 것은 맞지만, 소비자들이 눈에 띄게 인지할 만한 변화는 부족했다.


퇴근 후, 그리고 주말동안 무용은 집, 회사 근처 마트와 편의점을 끊임없이 돌았다.
그리고 점차 문제의 원인을 깨달았다.
소비자는 큐린이 달라진 것도, 그리고 특별한 점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트에서 우연히 만난 한 소비자는 큐린을 들고 잠시 망설이더니 선반에 다시 내려놨다.
무용은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혹시 이 음료를 드셔보신 적 있으세요?"
"음... 예전에 한 번 마셔봤는데, 사실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용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주, 무용은 이미주와 함께 새로운 홍보 전략을 제안했다.
"소셜 미디어에서 간단한 캠페인을 진행해보면 어떨까요?
큐린 제품 자체를 강조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소비자가 참여할 수 있게 해보는 거예요."


이미주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하나 생각해둔 게 있는데요," 이미주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소비자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챌린지를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큐린과 함께 찍은 인증샷을 올리면 소정의 선물을 주는 식으로요."


이미주의 말에 무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빠르게 아이디어를 적었다.


무용과 팀은 협력하여 소셜 미디어와 편의점 프로모션을 병행했다.
간단한 이벤트와 새로운 광고 문구를 추가하며 소비자와의 접점을 늘려갔다.
며칠 후, 반응이 없던 이벤트 페이지에 하나, 둘 후기가 올라왔다.


리뉴얼 후 두 달. 큐린의 매출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물론 목표치에는 여전히 못 미쳤지만, 긍정적인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직은 미비하지만, SL인터네셔널에 무용은 자신만의 발자취를 남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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