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 대학병원 병세권이 주는 행복
흔히 부동산은 입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쉽고 명확하다.
그런데 '입지의 가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경제와 사회구조의 흐름에 따라 가치가 바뀐다. 또한 인간의 생애 주기별로 시간에 따라 상대적인 입지 가치가 달라진다. 우리가 살아가며 생애주기상 꼭 다녀야 할 곳이 3군데 있다. 학교, 직장 그리고 병원이다.
우리는 사실 대부분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죽는다. 어찌 보면 우리 인생 사이클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매우 심플하다. 그래서 늘 애써 이런 단순한 결말을 외면해 보려 '뭔가 더 있지 않을까' 발버둥 치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래서일까. '병세권'이라는 단어가 있다. 대형병원의 우수한 서비스를 가까이서 받을 수 있는 주거지역을 말한다. 21년 기준 우리나라는 이미 인구 6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인 노인국가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2025년이 되면 5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이 되는 '초고령사회'가 된다.
'병세권의 가치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올초 설 연휴를 앞두고 부모님의 입원과 퇴원으로 분당서울대병원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병원 입구부터 차량과 사람들이 넘쳐 난다. 누구나 아프면 진찰을 받으러 와야 하고 누군가 입원하면 또 보러 와야 하는 곳이다. Top 클래스 대학병원이면 경기 호황과 불황 여파에서 자유롭다. 엘리베이터와 지나가는 복도마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까지 전국 방방곡곡 사투리가 모두 들린다.
'희로애락' 각각의 다양한 사연들이 진지하게 묻어나는 삶의 현장이다. 그런데 부동산 관점에서 이만큼 '대형 집객'을 가능케 하는 시설이 또 무엇이 있을까? 대형 쇼핑몰이나 대기업 본사 정도다.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간호사 그리고 관련 업체 인원까지 고려하면 웬만한 대기업 본사 이상의 경제가치를 창출하는 곳이 수도권의 대학병원이다.
'저성장 고령화 시대에 결국 여기 다 모여 있었네..'
갑자기 궁금증 '촉'이 발동했다. 우선 근무인원과 유동인구를 추정해 봤다. 분당서울대병원의 병상수는 1,335개이고 주차 대수만 2,900대가 넘는다. 국내 최대, 최고 병원 중 하나다. 직간접 근무 인원은 몇 명이나 될까? 이 병원은 2003년 개원 이후 계속 부속 센터들을 확장하고 있다. 최근 뉴스를 고려해 추정하면 최소 3,000명 이상은 될 것이다.
환자 포함 총 유동인구는 또 얼마나 될까? 동백 용인세브란스병원이 얼마 전 700여 병상 목표로 개원했는데 향후 1일 유동인구는 1만 5천 명 이상을 예상한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럼 2배 규모인 분당서울대병원은 1일 유동 인구를 3만 명 정도로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인근 30여 곳 약국에서 처리하는 분당서울대병원 외래 처방 건수만 1일 평균 3천 건이 넘는다 한다.
근무 인원만 3천 명에 유동인구 3만 명 수준이면.. 그냥 병원 건물이 아니다. 인근에 다양한 부동산 수요를 끊임없이 만들어 주는 경제적 가치생산 시설이다.
관련 근무자의 주거 수요뿐 아니라 입원 가족의 병간호, 통원 치료를 위한 임대 수요도 더해진다. 다양한 수요가 겹치는 곳이 병세권이다. 이 병원 바로 아래 하얀 주공 5단지를 보면 복도식 15평 아파트가 10년 전 매매가 1억 후반대에서 지금은 6억 대다. 월세는 보증금 2,000만 원/ 월세 95만 원에 나온다.
서울대병원이 20년 전 들어올 때부터 꾸준한 임대수익이 예상됐던 단지다. 초기에 월세용 투자로 싼 가격에 매입하여 운영한 사람은 좋은 시간 투자를 해온 셈이다. 최근 수도권의 주요 대학병원은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어 단기 임대용 방을 구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라 한다.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 인근의 환자용 고시텔은 월 150만 원까지 한다. 이것도 미리 예약을 안 하면 제때 구하기 어렵다 한다.
'좋은 병세권 입지는 복합 역세권 입지와도 같다.'
요즘 같은 부동산 침체기에 하방 경직성이 명확한 곳 중 하나는 대학병원 병세권 입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노후에 병세권 입지에서 산다는 것은.. 단지 경제적 가치 그 이상의 의미가 생긴다. 바로 노후 행복감과 관련이 있다. 서은국 교수가 말하는 '행복'의 정의는 어떤 목적을 찾는 철학이 아니고 단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감정이라고 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감정.. 지속성이나 편안함?'
내 경우 부모님이 응급실로 입원하고 퇴원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부모님 집이 병원과 10분 거리라는 점에 감사했다. 일단 내가 정말 편했다. 퇴원해도 통원치료나 검사가 계속 필요했다.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집과의 거리는 바로 편안함과 연결된다. 어떤 날은 오전과 오후 하루 2번씩 검사를 받아야 할 경우도 생겼다. 중간에 어디 가 있을 때가 필요한데.. 집이 멀면 정말 간단치 않은 일이다.
연로한 부모님과 번잡한 병원을 다니는 것은 힘들다. 옆에서 모시는 사람이 먼저 지쳐버릴 수 있다. 머리로는 이해가 돼도 답답한 상황에 여러 짜증이 불쑥 올라온다. 상당한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무겁고 괜스레 슬퍼지기 때문일까? 나를 보며 부모님이 뭘 느끼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행히 집이 가까워 기운 내서 왔지.. 이거 멀었다면 난 못할 거 같다.."
내가 나중에 80대 후반이 되면 나는 과연 어떨까? 생각해 본다. 자식의 도움 없이 최대한 스스로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노후에 살 곳으로 병세권은 꼭 기억해 두고 있어야 한다. 어쩌다 경험한 병세권의 가치는 제법 굵직한 의미로 남았다.
하루 햇살이 아득히 옅어져 가는 10월의 마지막 일요일이다. 나이 드신 부모님이 '대학 병원 가까운 곳에 산다는 것' 그거 하나 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했던 그때 그 겨울날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