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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Oct 08. 2023

비평가는 힘이 없다.

어릴 적 부모님이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은 10대 자녀와 공유할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엄마는 아침과 저녁을 가리지 않고 주로 막장드라마를 선호하셨고, 아빠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혹은 뉴스와 스포츠를 즐겨보셨다. 음악이나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싶었던 10대 청소년이 리모컨의 주도권이 없는 날에는 방으로 향했다.


2023년을 살고 있는 알파세대 어린이는 달랐다. 우리는 지난 추석 연휴 바로 전날에 예정되어 있는 아시안게임 축구 16강(대한민국 vs키르기스스탄)을 시작으로 방구석 응원단에 합류했다. 집에 있던 몇 안 되는 간식을 꺼내와 과자파티를 벌이며 모니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엄마와 아빠를 따라 열심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방구석 응원단에게 먹거리만큼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응원복과 응원도구이다. 옷장 속에 드라이를 맡기고 비닐도 벗기지 않은 한복을 꺼내어 아이들이 스스로 환복 한 후 미니태극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스케치북에 작은 태극기를 그리고 오려서 색연필 끝에 붙이면 아기들 손에도 착 감기는 응원도구의 탄생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대한민국 vs우즈베키스탄의 남자 축구 준결승전에도 응원도구는 재사용되었다. 언니를 따라 한복을 입고, 귀여운 손에 든 미니태극기를 힘차게 흔드는 모습은 마치 위인전에서 보았던 유관순 열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날도 치킨이라는 우리의 응원먹거리는 빠지지 않았다.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막내가 언니와 오빠로부터 새로운 응원박수를 체득할 즈음 남자 축구 결승전을 앞두고 아이들은 벌써 오늘이 끝이냐는 아쉬움과 함께 어떤 결과가 탄생할지 모를 기대와 설렘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치킨을 비롯한 각종 배달음식이 이웃 세대로 오는 것을 지켜보았으나 우리는 잘 참아내고 집에 있던 죠리퐁을 서로의 손에 한 그릇씩 쥐어주었다.


일본과 결승에서 만난 대한민국 선수들은 경기 시작 2분 만에 상대팀에게 골문을 내어주어 이번 아시안게임 중 처음으로 먼저 골을 내준 사례가 되었다. 바로 옆에선 아쉬움의 탄성이 터져 나오고, 평론가가 비평가가 되는 순간이었다. 따라쟁이 아이들이 아쉬움을 내려하자 나는 반대로 장점을 발견하고 칭찬하기 시작했다.


선점을 내주어 자신감이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선수팀은 한층 강하게 압박하며 경기에 임하기 시작했다. 눈이 뒤에도 있는 것만 같은 패스 연결, 지치지 않는 달리기, 공에 대한 집중력으로 동점골을 만들어냈고, 후반전에는 역전골을 터뜨리며 주도권을 가져왔다.


강한 상대에게 강하게 맞대응하고, 약한 상대를 일으켜줄 줄 아는 강강약약 경기를 아이들과 함께 보게 되어 어떤 드라마보다 값진 시간이 되었다. 아이는 경기 규칙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해서 왜 반칙인지 어떤 상황인지 가끔 중간에 묻곤 했다. 그리고 후반전 경기장을 지켜보던 아이는 어리둥절하며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저기는 지금 비가 오는 건가?"

아이는 화면 속 경기장에 비가 온다고 착각할 만큼 선수들의 온몸에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피, 땀, 눈물이 그저 바라던 결실을 맺게 되어 행복한 밤이다.

비평가는 아무런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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