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들어봤던 여러 의혹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출신에 관한 두 가지가 떠오른다.
첫 번째는 공대생 시절이다. 선배들은 졸업 전 취업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을 취득하려 전공과 관련된 학원에 다니며 도움을 받았었는데 재수강 듣는 선배들에게 필기노트를 아무렇지 않게 빌려주던 나는 얼마 후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쟤네 아빠가 학원장 아니야?"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같은 학번 편입생으로부터 직접 듣게 되어 놀란 토끼눈을 하고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저는 그런 사람 아닌데요."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나의 상상은 시작되었다. 우리 아빠가 학원 원장이라면 어땠을까.
두 번째로 중학생 때 나는 또래 아이들에게 아웃백 딸이었다. 패밀리레스토랑 중 하나인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는 청소년에게 언제나 로망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웃백에 방문하기만 하면 특별 할인은 물론 담당서버의 서비스도 따로 제공받을 수 있었다. 더구나 엄마는 매장에 가지 않아도 딸이 아웃백 메뉴를 먹고 싶어 하면 밀키트 형식으로 포장해 오셔서 집에서 오리지널 맛 그대로를 재현해 주셨다.
그래서 친구들은 내가 아웃백 점장의 딸이거나 최소한 직원의 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 의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음으로써 동의도 반대도 표현하지 않은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사실은 이러하다. 20년 전 우리 엄마는 아웃백의 직원이 맞고,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아웃백 직원의 식사를 준비하는 직원이었다.
10년 전과 20년 전에 들어본 말은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이어도 좋았을 의혹이었다. 이제 30년 전 진짜 내가 있었던 곳에 대해 사실을 말해볼 차례다. 태어난 지역은 서울특별시. 기억력이 특별히 좋은 사람은 아니기에 갓난아기 시절의 나는 사진과 친척들이 주고받는 대화로 유추할 뿐이다. 아빠는 목포전화국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목욕탕을 운영하며 기계와 설비 등 전반적인 일을 하셨다. 엄마는 여탕에서 여러 사람의 몫을 해내며 살림꾼 역할을 하셨다.
목욕탕 문을 여는 이른 새벽부터 청소로 마감하는 늦은 밤까지 일하느라 고단했을 부부에게 필요한 건 꿀잠 하나뿐일 것이다. 그러나 신생아는 부모의 마음과는 다르다. 낮동안 뜨듯한 아랫목 같은 곳에 눕혀져 자꾸만 눈이 감길 수밖에 없었던 아기는 밤이 되자 그곳을 벗어나 맑은 정신을 되찾았다. 엄마는 낮과 밤이 바뀐 아기를 업고, 아빠의 숙면을 위해 집 밖으로 나와 시장 골목을 돌아다니며 아기가 잠들기만을 기다리셨을 것이다. 이 당시 근처에 살았던 이모는 새끼 때문에 잠도 못 자는 여동생이 한없이 안쓰러우셨나 보다.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 이모는 만날 때마다 당시의 일화를 어제일처럼 꺼내신다.
"그때 네가 하도 안 자서 네 엄마가 밤새 업고 돌아다녔는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들을 때마다 괜히 죄인이 된 것 같아 억울해진다. 아기는 말을 못 하는 대신 울음으로 표현한다. 아기의 말이 어른들에게 가 닿지는 못했었나 보다.
"저는 사랑받으려고 태어났어요. 저 좀 봐주세요."
한두해 지나 우리 가족은 서울특별시에서 경기도 안양시로 이사를 했다. 이때 부모님이 직접 목욕탕을 운영하신 것은 아니었고, 아빠는 기관실에서 엄마는 여탕에서 일을 하셨다. 이때부터 기억이 나는 우리 집은 목욕탕 주차장 가장 안쪽에 있는 커다란 농막주택 같은 곳이었다. 아빠는 새벽 5시에 오픈하고, 엄마는 마감 이후 탕청소까지 하셨으니 여전히 목욕탕집 딸이나 다름없었다. 안양시 만안구에 위치한 이 목욕탕을 지도의 거리뷰로 보니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현존하는 이곳에서 이사를 가기 전까지 9년간 목욕탕집 딸이었다.
어릴 적 개고기를 소고기라고 속이며 입에 넣어주셔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크면서 자연스럽게 소고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알고는 먹고 싶지 않아 졌다. 약 10년이나 씻고, 빨래하고, 부모의 일터였던 목욕탕을 이제는 가지 않는다. 그래도 난 여전히 목욕탕집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