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평소엔 티도 안 내다가 무슨 기념일만 되면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은근슬쩍 내 마음도 표현하곤 한다. 30대가 되어도 어쩜 10대의 나와 이리도 비슷한지 떠올려보면 스스로 놀랄 지경이다.
남녀공학 중학교에는 어디에나 꼭 예쁘고 잘생긴 애들이 있기 마련이다. 개중에 눈에 들어온 아이는 키도 여자 아이들보다 최소 10센티 이상은 크고, 점심시간엔 꼭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면서 공부도 그리 못하지 않았다. 보나 마나 얼굴은 작고, 훈훈한 교회오빠 스타일.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들 눈에도 좋아 보이는 것이 진리였다. 그래서 그런 아이들은 대체로 두루두루 인기가 많고, 사랑받는 것에 익숙하다. 평소에도 인기를 체감할만한 아이에게 티를 내거나 표현하지 않았지만 다가오는 빼빼로 데이에는 여러 물량공세에 묻혀 크게 내 마음을 표현해도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학교에나 학생들에게 무서운 선생님은 있었다. 중학교 때는 수학 교과를 담당하셨던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평소에는 크고 강렬한 눈빛을 무표정으로 쏘고 계시기에 엄해 보이지만 수업방식은 더하기까지 하나하나 다 풀어서 설명해 주시는 친절한 수업방식 덕분에 다행히 수학을 좋아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빼빼로 데이가 다가오는 며칠 전, 학교에 빼빼로를 가져오면 다 압수가 될 거라며 분명히 안내를 해주셨다. 무얼 숨기는 것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것이지 무슨 자신감으로 들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당당히 용돈으로 사둔 빼빼로를 가방에 한가득 담아서 등교를 감행했다.
11월 11일. 언제나처럼 교문 앞에서 올백머리로 매서운 눈빛을 하고 계신 선생님께 한마디 저항도 하지 못하고 모조리 빼빼로를 반납한 채 홀쭉해진 가방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내 빼빼로는 전달되지 못했지만 그의 사물함에는 빼빼로보다 작은 달콤 간식과 편지들로 가득 찼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녀석의 이니셜은 PUR.
그렇게 허무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딸이 집에 온 줄도 모르고 방에서 엄마가 내 일기를 보고 계셨는데 하필이면 그것을 목격한 것이다. 사춘기 딸의 좋지 않았던 기분은 엄마의 몰래한 행동이 트리거가 되어 노발대발하며 공중에 짜증을 들이부었다.
일기에 쓰인 속마음을 들켜버려 당장 가출이라도 하고픈 마음이었지만 돈도 없고, 용기도 없는 학생은 별다른 대책이 없어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매일 일기를 싸들고 다닐 수도 없고, 열쇠로 잠글 수도 없으니 그날 이후로 일기 쓰는 것을 멈추게 되었다. 혼자 한 짝사랑도 일기도 모두 멈추는 것을 선택했다.
초등학생인 첫째 아이에게 스마트폰이 생기던 날, 아이는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는 비밀번호를 고민하다가 평소 알고 있던 엄마의 암호와 똑같이 설정해 버렸다. 가족 간에도 지킬 선이라는 것이 있지만 아직 아이는 엄마와 정말 가족 같은 사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20대에 엄마가 선물해 주신 반지와 귀걸이를 액세서리에 별 관심이 없어 친정에서 계속 보관 중이었다. 부모님이 집에 방문하신 어느 날, 아빠의 금반지와 나의 액세서리를 가져오셔서 첫째 아이에게 나중에 성인이 되면 녹여서 예쁘게 만들어 사용하라고 미리 건네주셨다.
그 순간 객관화가 비교적 잘 되는 나는 아이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엄마가 급할 때 팔아버릴 수도 있으니 꼭 엄마가 모르는 곳에 잘 보관해 두렴."
장난인 줄 알고 웃으며 들으신 부모님과 달리 아이는 즉각 실천했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반짝이는 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모르지만 아이는 동생에게 위치를 알려주며 보물지도까지 만들어 공유했다. 귀한 물건도, 작고 반짝이는 마음도 오래도록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