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케어 구수한 맛

by 쥐방울

하늘에 계신 외할머니는 1923년생으로 살아계신 동안 7남매를 낳고 기르셨는데 그중 일곱 번째로 태어난 막내딸이 바로 우리 엄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인구정책 시대에 딸 둘을 낳은 엄마와 저출산시대에 어쩌다 셋을 낳은 나는 그 시절 할머니의 삶을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서른여덟의 나이에 마지막 출산을 하게 된 할머니가 아들 셋과 딸 넷을 키워내기에는 그 시절 여러모로 무척이나 힘에 부치기에 할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공부를 할 수 있는 학교는 아들들만 보내고 딸들은 집안일과 밭일을 도우며 일찍 생업에 뛰어들게 하셨다고 들었다.


그래서 세명의 외삼촌은 고졸의 학력을 지녔고, 세명의 이모는 초등학교를 다녔거나 중퇴를 하셨다. 막내로 태어난 엄마도 딸이었으니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할 뻔했는데 엄마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장남이었던 큰외삼촌이 결혼하여 독립한 덕분에 외삼촌 댁에서 하숙하며 목포여상을 다닐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귀한 막내딸을 믿음직스러운 큰아들 편에 일찍 독립시킬 수 있었다. 덕분에 엄마는 집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후 목포의 어느 슈퍼마켓에서 경리로 일하면서 전화국에 근무하던 아빠를 만나 둘은 함께 서울로 상경했고 곧 부부가 되었다.


할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올라오신 적은 내 동생이 태어나던 무렵 나의 돌봄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60대 후반의 연세로 어린 아기를 돌보기 어려울 정도로 체력이 약해지신 할머니는 시장에 나갔다가 나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엄마가 많이 당혹해하셨고, 이후 돌봄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일 년에 한두 번 교통정체를 피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읍으로 향했다. 기억나는 것은 수세식 화장실과 피할 길 없는 모기떼들 그리고 사위의 방문에 키우던 닭을 잡아서 털을 뜯고 계시던 할아버지, 무척 야위어 허리도 잘 펴기 어려운 할머니 대신 주방에 드나드는 엄마의 모습이다.


청소년 무렵부터 중고등학교에서 일 년에 네 번 치르는 중간, 기말고사를 핑계로 시골에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이후 성인이 되자 늘 복용해야 할 약들이 한아름 쌓여있던 할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할머니는 시골집을 처분하게 되며 큰외삼촌 댁에서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치매증상이 시작되었다.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기도 하고, 대소변 실수가 잦으며 집을 나가서 길을 잘 잃어버리는 여러 증상이 심해지자 제일 가까이에서 간병을 담당하던 외숙모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였고 이모들과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극기야 나의 결혼식 날 어쩔 수 없이 모인 이들은 결국 참아온 갈등이 터져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이후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할아버지의 몇 안 되는 재산을 큰외삼촌이 물려받는다는 이유로 비용을 외삼촌이 감당하게 되었고, 이모들은 요양원으로 영양수액을 맞춰달라고 몰래 주문을 넣기도 했다. 요양원은 사실 요양병원을 감당하기 어려운 외삼촌이 한번 이동한 시설이었다.


이전보다 마음이 편해진 듯한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이모들의 얼굴을 훨씬 더 잘 알아보았으나 몸은 점점 말라가서 40kg도 되지 않았다. 정상적인 식사가 어려워 주사로 영양분을 보충하거나 액체로 된 환자용 균형영양식인 뉴케어 제품을 빨대로 겨우 조금씩 마시며 생명의 끈을 이어오고 있었다.


뉴케어는 병원에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엄마와 이모들이 할머니가 있는 요양원으로 택배를 보내시곤 했다. 온라인쇼핑이 낯선 엄마는 항상 나에게 주소를 카톡으로 보내며 대리주문을 부탁하셨다. "뉴케어 구수한 맛으로 2박스 부탁해."


할머니는 10년 조금 넘게 막내딸의 유년 시절을 보고선 아흔이 넘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결혼 후 유일하게 매달 용돈을 보내던 딸에게 매번 고맙다는 말씀만 하시던 할머니. 워킹맘으로 살아가면서 보고 싶은 할머니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뉴케어를 보내는 것이 전부였던 엄마. 두 여성의 사랑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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