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이라는 흔한 주례사처럼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생겨 서로 알콩달콩 염색을 해주며 머리를 가꾸어주는 품앗이는 60대 정도에 일어나는 줄 알았다. 상상은 고이 접어두고, 현실은 30대인데 출산 이후 급속도로 늘어난 새치를 커버하기 위해 그것도 배우자보다 먼저 염색의 길로 접어들었다.
새치를 커버하지 않고 살아가기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앞자리가 바뀌어 보이는 마법 같은 착시 현상 덕분에 작년부터 두피 건강이 허락하는 한 뿌리염색을 지속하고 있었다. 무더위가 찾아온 6월, 마지막 뿌리염색을 한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거울을 보니 어느새 쑥쑥 자라난 머리카락들로 변화를 감지했다.
예약을 하고, 방문해서 한 시간 넘게 가만히 앉아있다 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사람인데 최근 들어 장벽이 하나 더 생겼다. 홀로 가계 긴축정책을 펼치고 있는지라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영역인 품위유지비 항목에는 많이 망설여지게 되었다.
집 근처의 미용실 세 곳은 마치 짠 듯이 뿌리염색 3회에 12만 원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요즘 물가를 감안하면 서비스 비용이라고까지 말씀하시지만 1회당 4만 원은 불가하고, 단발성으로 결제하기 위해서는 전체염색비용인 6만 원을 받으신다고 하셨기에 다시 같은 미용실 문을 두드리기엔 조금 무거운 마음이었다.
이럴 때엔 보통 많이 이용하는 셀프염색이 제격인데 혼자 하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 손재주가 좋고, 부탁을 했을 때 거절할 확률이 적은 동거인 바로 배우자였다. 예상대로 염색약을 사서 집에서 해줄 수 있냐는 물음에 흔쾌히 가능하다는 답변을 해주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상황이었지만 계속해서 낯설기만 했다. 우리 부부는 아직 30대이고, 게다가 출생연도만 보면 나는 배우자보다 어리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 염색을 시작한 친정부모님만 떠올려보아도 아빠는 셀프염색, 엄마는 뿌리염색 균일가 2만 원짜리 미용실만 줄곧 다니셨으니 이보다 더 새로울 순 없었다.
평소보다 여유 있는 주말이 되어서야 배우자와 함께 산책 겸 염모제을 구입하러 자주 들리는 드럭스토어에 방문했다. 염모제가 있는 것을 알고 방문했지만 이렇게 종류가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 선반 한가운데 비치된 불변의 염모제 1위 미장센 제품은 두피가 따가웠던 기억이 생생해서 패스.
좌측의 푸딩사진으로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귀여운 이지엔 푸딩 헤어컬러는 10대의 핫하고 힙한 온갖 'ㅎ'의 느낌이라 패스. 결국 눈길을 돌리고 돌려 글로벌한 로레알 브랜드 앞에 멈춰 섰다. '두피샴푸와 마스크로 케어까지 한 번에!'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었지만 마자막까지 컬러 선택은 역시 어려워서 도움을 받았다.
늦은 저녁 주방 의자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처음으로 셀프염색 세계에 입문한 배우자는 각종 외국어로 다채롭게 쓰여있는 설명서를 보더니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곧 믿음직한 모습으로 두피로부터 2센티 길이를 모두 꼼꼼하게 색칠해 주었다.
그리고 배우자 이외에 간과했던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아이들이었다. 집에서 처음 벌어지는 광경에 눈동자 두 개씩 모두 여섯 눈동자가 초롱초롱 멀리서도 나만 지켜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본인들도 머리색을 바꾸고 싶다며 야단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의외로 이들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엄마, 머리에 뭐해요?"
"머리가 무슨 색이 되나요?"
"엄마 정말 예뻐요!"
단순한 궁금증과 호기심에 나왔던 둘째와 막내의 질문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빠를 따라서 미용실 보조역할을 자처한 첫째 아이는 어깨에 두른 수건에 고정할 집게를 가져다주고, 얼굴에 묻은 염색약을 물티슈로 재빠르게 닦아주며 끝끝내 동그랗게 말아져 올린 올백머리를 보고는 예쁘다고 표현했다.
미용실에서 염색할 때마다 거울로 마주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누가 봐도 골룸인데 예쁘다니. 콩깍지가 단단히 씐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잔잔한 관심을 받다 보니 시나브로 샴푸할 시간이 다 되었고, 염모제 키트에 들어있는 샴푸를 잘 이용하여 마무리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염색이 잘 된 것은 물론이고, 염색 후 당일과 다음날까지 두피가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무척 기뻤다. 이 모든 것은 염모제를 바르는 내내 머릿결이 상했다느니 두피가 안 좋다느니 이런저런 구시렁대며 잔소리 한번 하지 않은 배우자의 공이 컸다.
제대로 돈을 아꼈으니 두 달 뒤에도 치킨이나 피자를 사주며 다시 부탁해야겠다는 굳건한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생애 처음 염색 과정에서 예쁘다는 말을 들어보게 해 준 아이들에게도 고마웠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곱씹어보아도 이들은 말로 나를 살리는 사람들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