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어느 날, 아이의 학교에서는 2026년도 1학기 학생자치회 임원선거를 실시한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어미는 이런 게 있구나 싶은 마음으로 몇 초 후 바로 다른 관심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같은 내용을 확인한 첫째 아이는 어미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후보자 등록기간을 일주일 앞둔 날, 하교하던 아이의 가방에서는 후보자등록을 위한 서류들이 나왔다. 어미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스스로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전교임원 입후보 등록이라니. 이미 일상 육아로도 빠듯하다고 느껴서인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몰라 마냥 신나는 응원의 말들이 나오지 않았다.
일전에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슬로건을 보고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송고하여 채택되었던 경험이 떠올랐다. 이 아이는 4학년이니 전교 부회장후보에 당연히 출마해도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 어미에 그 딸인 셈이라 할 말이 없었다.
후보에라도 올랐으면 좋겠어
전교부회장 후보는 마음을 먹고 신청서만 내면 되는 게 아니었다. 본교 재학생이라는 입후보자격 이외에도 선거권자 15명 이상의 추천을 받은 학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또래 아이들에게 추천을 받으면 그만이겠지만 문제는 같은 학급에 전교 부회장 후보로 나가는 아이가 세명이나 있었다는 점이다.
선거권자 학생이 여러 후보자에게 중복 추천은 불가하기에 같은 반 아이들 몇 명과 다른 학급의 지인을 포함해 이틀에 걸쳐 후보자 추천 명단 사인을 완성하여 제출했다. 후보자 추천 명단 사인을 받아오던 날 저녁에 아이는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안 좋다고 했다.
사회성이 부족하지는 않지만 매우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기에 후보자 추천 명단에 사인을 해달라고 일일이 설명하고 요청하는 일은 낯선 경험이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구나 싶은 마음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후보에라도 올랐으면 좋겠다는 아이의 발언에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길임을 직시했다.
기호 14번까지 있다는 게 실화일까
본격적인 후보자 등록을 마치고 기호를 추첨하여 부여되는 날 아이는 기호 2번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4학년인 부회장 후보자는 모두 14명으로 기호 14번까지 있다는 소식도 알게 되었다. 내 아이가 후보로 나간다는 소식보다 후보자가 이렇게나 많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핸드메이드 벽보는 단 한 명
후보자는 기호, 성명, 사진, 자기소개와 공약사항 등을 기재한 벽보를 만들어 제출해야 했다. 교내 복도에 게시하기 위함인데 규격인 4절지로 '직접 제작'하는 것만이 원칙이었다. 아마도 업체에 맡겨서 그럴싸한 벽보 제작을 방지하기 위한 것 같았다. 그런 연유로 벽보는 코팅이 되어있으면 안 된다고 별도로 말씀해 주셨다.
애초에 맡길 생각 같은 것은 해본 적도 없지만 실제로 초록창에 '전교회장 벽보'라고 검색하니 대리 제작이 가능한 스마트스토어가 다양하게 존재했다. 똥손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이소에서 4절지를 색깔별로 담아 오고, 아이가 원하는 반짝이 풀을 사다 주는 일이었다.
벽보에 들어갈 사진도 휴대폰에 있던 아이들 사진에서 첫째 아이의 모습만 본떠 A4 종이에 컬러 출력을 해주었다. 벽보가 각 층의 복도마다 게시된 날, 아이는 딱 한마디를 남겼다. "벽보를 직접 만든 사람은 내 거밖에 없더라."
'읭?' 직접 제작이 원칙인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제출한 건가 싶어 물으니 온라인 그래픽 도구로 디자인해서 만든 것을 한 장으로 깔끔하게 출력한 모양이었다. 빈 종이에 사진을 오려 붙이고 색색의 매직으로 글씨를 써서 반짝이 풀로 꾸민 벽보는 스무 명이 넘는 전교임원 후보 중에 한 명이었다.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더니
3일간의 아침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선거도우미는 3명 이내고, 홍보용 피켓도 3개까지만 가능했다. 부착된 벽보를 본 이후 피켓은 캔바로 만들겠다고 했다. 디자인 편집 프로그램을 이미 학교에서 배운 아이는 나와 실력이 유사하다. 아이가 만든 그림파일을 A3로 출력해 주는 것이 어미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이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반에서 두 명으로 아이까지 포함하면 선거도우미 3명이 딱 충족되었다. 조금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부분들은 누가 미리 알기라도 했는지 감사하게도 행운이 계속 따라주었다. 피켓 손잡이 부분이 부러지자 등교하는 동생에게 테이프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여 급하게 수리를 완료하기도 했다.
멸치와 돼지라는 지적과 저주를 퍼부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이 둘이 학교에서는 제법 손발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더니'로 시작한 일화를 말해주며 첫째 아이는 동생을 보지 않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이런 게 노룩인사인가 싶었다.
축하파티를 미리 공지합니다.
투표일 하루 전날 아이들을 불러서 내일 저녁 축하파티를 할 것이라며 미리 공지를 했다. 맛있는 것을 먹으러 외식을 할 수도 있고, 집에서 케이크에 초를 불 수도 있으며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오랜만에 야식을 먹을 수도 있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축하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내일이 바로 첫째 아이가 새로운 일(전교 부회장 후보)에 도전하여 마침표를 찍는 날이기에 우리가 축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마침표의 결과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결과라면 성공이라 부르고, 그것이 아니라면 실패라고 부르는 것만 같다.
둘째 아이는 누나가 벽보, 피켓, 소견발표 등 여러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에휴 난 4학년이 돼도 안 해야겠다." 그럴 만큼 막상 하겠다고 마음먹어도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과 귀찮은 감정들이 계속 쏟아진다. 그것들을 참고 본인이 하겠다고 한 것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마침표를 찍는 것은 축하할 일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어떤 일을 끝까지 해 본 경험에 대해 축하하고 싶었다. 선거 결과가 나오고 나서 파티를 하는 것은 성공에 대한 축하일 수도 있고, 실패에 대한 위로일 수도 있으니 당선 여부에 관계없이 과정을 축하하고 싶었기에 미리 공지하였다.
둘째 아이에게도 당연히 무언가 어떤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했더라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실패할까 봐 두려워 아예 도전이라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언가 선택해서 끝까지 책임지는 일이 더 귀한 자산을 쌓는 일이라는 것을 미리 축하파티를 공지하며 알게 되길 바랐다.
마침표를 찍은 사람들만의 세상
선거운동을 마치고 바로 다음날 투표가 시작되었다. 1교시에 장기자랑으로 대체된 듯한 소견발표를 시작으로 2교시 투표, 하교 후 개표가 이루어졌다. 당선자 소식은 우리의 축하파티가 시작되기 전 이미 스치듯 지나간 학우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타 학급의 후보자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우리는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아이는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당선자 공고가 나온 이후에도 우리의 축하파티는 실패를 위로하는 자리로 바꾸지 않았다. 실패를 하며 끝까지 가본 아이들의 결과 속에는 어느새 성공이라는 행운도 찾아올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작은 사회인 아이가 경험하는 학교만 보아도 세상은 마침표를 찍은 사람들만의 경쟁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끝까지 경험해 본 이들 중 재도전을 하는 사람은 일부분이 된다. 그 일부분이 또 끝까지 어떠한 과정을 해낸다면 확률은 점점 높아진다. 내가 할 일은 그저 아이가 배를 타기로 했을 때 함께 노를 젓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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