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거부하는 행위

정서적인 학대

by 쥐방울

어느 댓글을 마주한 날, 본질적인 의문이 마음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부모와의 대화 부족으로 혼자 마음속 소용돌이를 어쩌지 못하고 있을 무렵, 이런 조언을 받았다.

학대, 가정폭력 등의 절연할만한 상황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오지랖이나 행동방식이 싫으시다면 깊은 대화를 나누시거나 싸워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다 맞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더 한 글자 한 글자 떠올려보았다.


어린 시절 학대라고 생각될만한 경험은 없었다.

타인에 의해 신체에 멍이 심하게 든 적도 없다.

7살 전후의 나이에 거짓말을 했다며 거짓말을 하지 말자는 가훈에 따라 호되게 다리를 회초리로 맞으며, 무서워서 그 자리에 소변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외에는 밥상을 엎거나, 감정이 격해지셔서 수건을 던지시던 기억이 있지만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시간에도 회초리를 들고 선생님이 감독하시던 시절이라 특별히 우리 집이 유독 이상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가정폭력과 다른 점이 있을까 싶어 검색해 보았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정의)에 의한 "가정폭력"이란 가정구성원 사이의 신체적, 정신적 또는 재산상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를 말한다.

신체적인 폭력 - 일반적으로 가정폭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폭력 행위

정서적인 학대 - 폭언, 무시, 모욕과 같은 언어적 폭력으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과 더불어 상대에게 직접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위협하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부수는 것

경제적인 폭력 -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낮거나 없는 쪽에 가하는 경우

성폭력 - 원하지 않는 성행위를 강요하는 행위

방임 - 주로 나이 든 부모 혹은 어린 자식에게 가하는 경우


여러 종류 중에 정서적인 학대의 예시는 다음과 같았다.

- 경멸하는 말투로 모욕을 주는 행위
- 능력이 없다고 비난하는 행위
- 큰 소리로 소리 지르거나 비난하는 행위
- 언어폭력을 이용해 공격,협박,위협하는 행위
- 대화를 거부하는 행위
- 비웃거나 희롱하는 행위
-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행위
- 피해자의 의사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
- 강요하는 행위
- 가족관계를 끊겠다고 위협하는 행위
- 다른 집 자식들과 비교하는 행위

(출처:나무위키)


눈으로 읽어나가는 항목마다 스쳐가는 장면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먹고사는 것 자체가 자녀의 양육보다 더 큰 부분을 차지했던 부모님 아래서 자라왔던 세대 중 상처받지 않고 성장한 행운아는 거의 드물 것이다.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꽤 오랫동안 시선이 머물었던 항목이 있다.

대화를 거부하는 행위


오지랖이나 행동방식 자체가 싫었던 것이 아닌 그로 인해 가정 내에서 해결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가정 밖으로 문제가 퍼지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발생되는 점이 불편했다.

누구보다도 모든 인간관계의 해답은 대화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 대화를 하고, 싸워서라도 관계회복을 도모해야 할 텐데 왜 그것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일까.


20살 이전의 감정은 무서움이다.

자녀에겐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부모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보았을 때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분들이었다.

삶이 고단하여 자주 술을 드시고 귀가하거나 집에서 반주를 드시는 날에는 방에서 빠르게 소등하고 자는 척을 하느라 바빴다.

조금 머리가 커진 고등학생이 용기 내서 생각을 말하자 들고 계셨던 수건이 날아들어서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독립이 답이라는 결론만 내렸다.

20살 이후 학업과 경제활동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는 다행히 크게 마주 칠일 없었고, 어쩌면 이제 와서 무언가 말씀드려도 변화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드라마에서처럼 가족끼리 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화목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어릴 적 기억은 없다.

평일저녁에도 아빠는 본인의 커리어를 높이는데 시간을 쏟으시고, 주말 역시 집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소음이 심한 근무환경으로 청력이 많이 약해진 아빠는 실제로 대화정도의 보통 데시벨이 들리지 않으셨고, 본인이 잘 들리지 않으니 말씀하실 때도 항상 목소리 톤이 높으셔서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은 화가 난 상태로 인식하기 쉬웠다.

실제 집에서 텔레비전 음량은 무음이거나 아주 높여서 보시거나 둘 중 하나였다.

40대 이후 낮아진 시력으로 안경 착용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생각하시는 반면, 보청기 착용은 마치 장애인이 된 듯한 느낌이셨는지 한사코 그대로 일상을 유지하길 원하셨다.


사람이 기분 좋은 날만 지속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아빠의 기분은 대화의 여부로 알 수 있었다.

잘 들리지 않아서 단답형 대답조차 없는 것이 아닌, 아예 사람이 지나가도 눈길조차 주지 않으신 나날들이 많았고 투명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다른 친척들이 찾아와도 내키지 않으면 방에서 나오지 않으시며 본인의 할 일에만 몰두하셔서 자녀로서 굉장히 민망했던 적이 많았고 그분들에게 죄송스러웠다.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그냥 조용히 지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고, 엄마는 집안 경제의 상당 부분을 아빠가 담당하고 있는 현실이기에 매일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통해 혼잣말처럼 작게 욕을 하시는 게 들릴 뿐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가정을 꾸린 한 사람이 되고 나서는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건강한 노후를 위해 금주를 하시고, 운동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엄마는 아빠가 달라졌다고 말하신다.

또한 손주를 보시는 모습에서는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질 만큼 애정이 가득하시지만, 어릴 적 아이를 대하셨던 습관들이 남아있어 옆에 있으면서 흠칫 놀라기도 한다.

"머리는 꼭 묶어야지, 양말은 꼭 신어야지, 흙은 만지면 안 돼."와 같이 아이들의 자율성과 선택권을 존중해 주실 마음이 없는 태도에서 또 아찔했다.

용돈을 주시는 모습에서는 마음속으로 '돈으로는 사랑과 감사, 존경이 생겨나지 않아요!'라고 외쳤다.


답답한 어린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교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최대한 천천히 가는 것이었다.

지금도 용기를 내자면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지만, 대화가 아닌 어쩌면 혼자만의 외침에 가까울 듯하다.


그럼에도, 그 끔찍한 세월 속에도 사랑은 있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하루에 여러 번 물을 달라고 말씀하시고, 엄마는 아빠가 회식을 하고도 귀가해서 밥을 달라는 말에 365일 집밥을 차려내시는 것으로 서로 사랑을 표현하신다.

없는 형편에 살림을 꾸리기도 힘드셨을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과외를 받고 싶다는 딸의 말에 고2 때 수학, 화학 각각 30만 원의 과외를 시켜주셨다.

술냄새를 풍기며 귀가하는 와중에도 딸들이 좋아하는 투게더 아이스크림과 시장에서 신문지로 돌돌 쌓여 검은 봉지에 담긴 순대를 종종 사 오셨다.


급변하는 디지털 세상이 여전히 낯선 부모님을 위해 자녀로서 20년째 온라인으로 해야 하는 일을 도와드리고 있다.

온라인 쇼핑, 은행 업무, 연말정산 등등

어린 자녀를 부모의 목숨보다 더 귀하게 키워내는 어버이 은혜를 이제는 너무도 잘 알기에 부모님이 어려운 일이 생기셨을 때 도움을 드리는 것은 자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이 든 부모는 성인이 된 자녀에게 여전히 도움을 주고 싶은 부분이 있으신지 감사할 일인데도 자꾸만 뜻밖의 일로 파생되는 점이 두려웠다.


이런 양가적 감정으로 오늘도 회오리의 한가운데 서있다.

할 수 있는 일은 현재를 살아내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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