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쥐방울 Feb 04. 2023

남편의 김치볶음밥

아침, 점심, 하교 후, 아빠 퇴근 후. 하루 4끼 먹던 중학생에게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음식으로 김치볶음밥이 있었다. 먹성 좋은 10대 딸내미의 요청대로 고기나 가공육을 넣은 김치볶음밥을 해주시거나 그도 아니라면 달걀프라이라도 꼭 올려주시곤 했었다. 우묵한 프라이팬에 곰탕처럼 한가득 해놓으시던 엄마의 김치볶음밥을 보고는 '저걸 언제 다 먹으려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생각이 무색할 만큼 끝도 없이 잘만 흡입했다.


엄마밥 먹고 자란 딸내미는 어느새 결혼하고 20개월 터울로 아이 셋을 낳게 되면서 육아라이프 9년 차에 접어들었다. 미취학 아이들 3명과 함께하는 식사시간에는 자극적인 맛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닭볶음탕 대신 간장찜닭, 김치찌개 대신 된장국, 짬뽕 대신 짜장면. 외식을 해도 언제나 아이들이 환호하는 메뉴인 돈가스와 순한 맛 면요리가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을 공유하다 보니 점점 매운맛과 멀어지게 되고, 스스로를 위한 음식을 차려내기 위해 매콤한 요리를 하기에도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아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음식을 한 번만 차려내곤 한다. 이젠 라면 먹을 때조차 김치를 꺼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무뎌지고 있을 즈음이다.


어느 주말, 아침을 간단히 마치고 배우자는 점심에 아이들과 함께 먹을 김밥을 말았다. 저녁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 장을 보지 않아 여유로운 냉장고를 살펴보고 김치볶음밥을 하겠다는 말이 들려와서 속으로 환호를 외쳤다. 김치볶음밥을 하려는 남편은 김치부터 꺼내는 엄마와 달리 유튜브에 검색부터 시작한다. 백종원 요리법과 류수영 요리법 중 어느 것으로 해야 할지 1분 정도 고민한 후 주방으로 향한다. '햄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말과 함께 파기름을 내서 완성해 낸 김치볶음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한동안 매운맛을 잊고 살았던 나에게 소울푸드 격인 김치볶음밥을 선사해 준 남편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날만큼은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서 게임에 열중하는 뒷모습을 보고도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지 않고, 집안일을 대충 마친 채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데 집중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장 보러 가는 창고형 대형마트에 아들이 좋아하는 햄이 할인하길래 듬뿍 사 왔던 날이었다. 입이 짧은 아들에게 비장의 무기로 쓰려고 주방 상부 수납장에 넣어두었던 햄을 퇴근 후 출출한 기색을 한 배우자가 여기저기 열어보다가 발견하게 되었다. 아빠 뒤를 졸졸 쫓아다닌 아들도 얼떨결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늦은 밤에 당장 햄을 구워달라는 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배우자는 커다란 통조림 햄을 꺼내어 반으로 갈라서 반은 노릇하게 구워 아이들에게 내어주고, 나머지 반은 잘게 다져서 햄김치볶음밥을 만들어냈다.


어릴 적 엄마처럼 이젠 엄마가 아닌 배우자가 우묵한 프라이팬에 한가득 해놓은 김치볶음밥은 야식으로 나와 배우자가 한 그릇씩 두둑이 먹고도 또 남아서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지난번 김치만 넣어 만들어낸 김치볶음밥이 내심 기억에 남았는지 플레이팅 된 김치볶음밥에는 하트로 모양낸 햄이 올려져 있었다. 매번 사진 찍는 것을 잊어버리는 나는 다행히도 이번에는 뇌에서 '사진을 찍어야만 해'라고 알려주어 남길 수 있었다.


결혼 10년 차가 된 부부는 5인 가족이 되어버린 우리네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서로 전쟁터 같은 각자의 자리에서 매일 애쓰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낯간지러운 사랑표현은 잘하지도 못할뿐더러 늦은 밤 맥주 한잔 기울이며 안주 삼는 대화조차 1년에 한두 번 갖는 것이 어려운 현실이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는 배우자에게 사과와 아메리카노를 내어준다.

배우자는 가끔 주말에 김밥을 싸고, 김치볶음밥을 만든다.


특히 입맛 없는 평일에 밀폐용기에 남겨둔 김치볶음밥을 데워먹으며 더 행복을 느낀다.

매거진의 이전글 재수 없는 그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