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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Mar 04. 2023

꼴 보기 싫은 사람이면서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

몇 해 전 OTT 플랫폼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보게 된 작품 <툴리>(Tully,2018)는 지금까지 가장 많이 울면서 보았던 영화다. (현재는 왓챠에 업로드되어 있다.) 상영시간 90분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자고 있는 아이들이 깨지 않게 꺼이꺼이 숨죽여 울었던 기억이 있다. 비슷한 국내영화로는 <82년생 김지영>(2019)이 있는데 <툴리>가 더 인상 깊었던 이유는 아마도 주인공 '마를로'라는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사를리즈 테론 배우가 22kg가량 몸무게를 증량한 덕분에 안타깝게도 거울을 보는 것 마냥 내 모습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극 중 내용은 육아에 지친 마를로(샤를로즈 테론)가 남편이 있음에도 사실상 세 자녀를 홀로 돌보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야간보모의 도움을 받는 일상을 담고 있다. 이때 26살 야간보모가 바로 툴리(멕켄지 데이비스)라는 인물이고, 덕분에 마를로의 삶이 조금씩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전은 툴리가 바로 마를로 자신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20대 시절의 본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후 남편은 그동안 일과 아이들로 인해 아내에게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함을 표현하며 부부는 함께 일상을 보내는 것으로 끝이 난다.



내게는 꽤나 훌륭했던 이 영화는 아쉽게도 배우자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해 클릭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웃기면서도 슬프지만 이러한 영상을 보는 사람은 육아의 고충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도 20대 툴리 덕분에 눈빛과 말로 위로를 받으며 실컷 울고 나니 또 한 번의 번아웃을 떨쳐내고 일상을 살아낼 힘을 얻었다.

"실패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꿈을 이루신 거예요." 머리로는 알지만 한 번도 타인에게 들어본 적 없던 대사였다.




퇴근한 배우자에게 막내의 양치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양치하기 싫어하는 아이의 몸짓을 보고는 하루 양치 안 한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어물어물 덮어졌다. 그러면서 본인 양치를 꼼꼼히 마무리한 채 이불속으로 들어가 버려 결국 아이들 케어는 부메랑처럼 돌고 돌아 내 차지가 되었다. 본인도 한 끼 정도는 건너뛰고, 하루정도는 양치를 안 해야 맞을 텐데 무척 모순적이고 꼴 보기 싫은 순간이었다.


배우자가 유일하게 담당하고 있는 집안 필수 업무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분리수거다. 그런데 이것조차 힘들어하는 날이 있었고, 간혹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하루를 온전히 보낼 때 몸서리치듯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정말 궁금해서 질문한 적이 있다. 출근해서 회사업무를 하는 것과 집에서 육아와 살림을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힘든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답변은 기가 막혔다. 두 가지가 다른 종류의 힘듦이라서 어느 것 하나 고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머리로 이해는 되지만, 진심으로 와닿지 않아서 알겠다며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배우자가 집에서 육아와 살림을 할 경우 혼자가 아닌 업무를 최소 반 이상은 나눠서 하는데 그것까지 감안하고 생각한 것일까 의문스러웠다.


주 52시간 근로시간이 사실상 폐지되며 배우자는 야간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쉬는 날 없이 출근해서 마감기한을 맞추기 위한 업무를 하고 있다. 나 역시 '마를로'처럼 세 아이의 육아는 온전히 내 몫이 되어 빈틈없이 일상은 흘러가고 있다. 20대의 스스로를 소환해서 '툴리'라는 야간보모를 만들어내지는 않지만,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집안일은 미뤄둔 채 글을 쓰며 다른 페르소나로 병행하며 살아간다. 오전에는 써야 하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아이들이 잠든 자정이 다가오면 아이 학교에 제출할 서류인 학생기초조사표를 작성한다.


tvN 예능프로그램 <알쓸인잡>에 출연하신 김영하 작가는 알츠하이머 병을 가진 사람이 기록을 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글을 쓴다."


존엄을 위해 글을 쓰며 일상을 지속하기에 더욱 스스로를 한계에 몰아붙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난주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두통이 지속되어 하루도 운동을 해낼 수 없었다. 점심때 즈음부터 시작된 기분 나쁜 두통으로 약을 한 알 먹고, 나아지지 않아 저녁 즈음 다시 두통약 한 알을 더 먹었다. 자정이 다가올수록 양쪽 관자놀이에서 찌를듯한 두통을 느껴 두 알을 더 먹었지만 잠이 들지 못해 새벽까지 머리를 감싸 쥐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고 아침을 맞이했다. 잠깐이라도 자고 일어나니 좀 나아진 몸으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오후가 되면 전날과 같은 일이 똑같이 벌어졌다.


어느새 며칠 지속되었고, 그날 새벽도 침대에 누웠다가 침대 옆 바닥에 내려와 머리를 감싸 쥐는 행동을 반복했다. 배우자는 자정 무렵 퇴근해서 역시 피곤한 몸으로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일은 또 괜찮아야 할 텐데 아니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잠든 줄 알았던 배우자가 내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병원에 가보라는 둥 가정보육을 하는 나에게 아이들을 기관에 당장 보내라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저 상대방을 존중해 주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고 있음을 서로는 알고 있었다.


부모도 자녀도 날 때부터 선택할 수 없이 맺어진 혈연관계이지만, 배우자는 다르다. 배우자는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가족이다. 가족이지만 완벽한 타인이기에 구성원으로서 꼴 보기 싫은 순간이 상대방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선택을 누구보다 지지해 주고, 영화 <툴리>의 '마를로'같은 모습이어도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 배우자라 정말 다행스럽고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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