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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Apr 26. 2023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는데

뒤늦은 여권 갱신

요즘은 3개월 시한부 휴직 중인 배우자가 가정에서 하숙생이 아닌, 하숙생 주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난번 배우자의 휴직이 시작된 이후 행보에 관해 에피소드를 담아냈고, 이번은 그 연장선에 있는 3탄이다.

혹 못 보시고 궁금하신 분을 위해.

1탄 : 남편이 육아휴직하며 제일 먼저 한 일

2탄 :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이상하치만치 일상이 버겁게 느껴지는 때가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응급신호였다. 평소 힘들어도 힘들다고 주변에 잘 이야기하지 않는 성격인 나는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도 이러한 상황이라며 터놓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각자 나름의 힘든 부분이 있을 것이고, 나 역시 힘들어도 그 강도의 차이일 뿐이지 안 힘든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거리 두기가 해제되면서 배우자의 근무일상도 정확히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며 평일 저녁은 물론 주말이 없는 삶이 되었다. 아이들의 시간은 잘만 흘러갔는데, 나의 시간은 멈춰있는 것만 같았다. 팬데믹이 그동안 우리에게 안겨준 장점은 딱 하나. 그래도 가족이 함께한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토할 것 같은 일상에 답답함이 극에 달하였을 때 가족에게 공표했다. 초등학생인 첫째가 방학하는 여름에 한 달 남짓하는 기간 동안 말레이시아에 다녀오겠다고 말이다. 엄마의 확신에 찬 말을 들은 아이들은 드디어 우리도 해외에 나가보는 것이냐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주었고, 배우자는 무반응이었다.


그리고 주말에 가족 중 기간이 만료된 나와 첫째 아이의 여권 갱신을 위해 사진 촬영을 하고 재발급 신청을 하러 민원실에 다녀왔다. 참고로 배우자도 기간 만료 상태였지만, 갱신을 함께 하지 않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해 주어 더욱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나와 아이 셋, 이렇게 넷이서 결국 다녀오려나보다.'



그렇게 3일 후 나와 아이들의 여권은 준비되었다. 둘째와 셋째의 초록 여권, 첫째와 나의 남색 여권. 그리고 당시만 해도 계획된 회사 업무 일정을 보았을 때 함께할 가망이 없을 것 같은 배우자에게 말했다.


나중에 생각 바뀌면 퇴사하고 오던가,
아니면 그동안 잘 먹고 잘 살고 있어요.


나에게는 국내에서 동물원, 대공원, 테마파크 등 홀로 아이 셋과 다니는 것이 해외라고 큰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친정엄마는 혼자 타 지역으로 아이들과 나들이를 간다고 말씀드리면 초장부터 놀라시기에 요즘은 거의 다녀와서 말씀드리곤 한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해외살이는 비밀에 부쳐보려 했으나, 할머니와 제일 친한 첫째 아이가 벌써 말씀드렸다길래 반응을 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시는 듯하다.


그렇게 여권과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다음날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하려 했다. 어차피 어느 곳이던지 생활비는 비슷하게 들 테고, 항공권과 숙소는 할부로 결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큰둥했던 배우자로부터 낮에 카톡이 하나 도착했다. 내용은 퇴사하겠다고 말해두어서 잠시 후 상무와 면담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머릿속이 역동적인 하루를 보내고 왔을 배우자는 그날 저녁 퇴사 확정 소식 대신 육아휴직 3개월이라는 결과를 들고 돌아왔다. 한순간에 미래가 바뀌어버린 느낌이었다. 곧이어 배우자의 한마디는 온 가족을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여보 가자던 그곳,
여름방학 말고 최대한 빨리 가보자.


누군가에게는 찰나일 수도 있고, 사업주 입장에서는 길 수도 있을 3개월 안에는 아이의 여름방학 기간과 겹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아이의 학기 중에 여행을 계획하는 무모하지만 용감한 부모가 되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뒤늦게 배우자는 온라인으로 여권 재발급을 신청하고, 육아휴직 이후 세 번째로 향한 곳은 수령을 위해 여권민원실이 되었다.


셋째 아이가 돌도 안되었을 무렵 그때도 무모하지만 용감하게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었다. 기저귀와 햇반, 김 등 거의 이사 가는 수준으로 짐을 챙겨가며 다녀온 여행은 나와 배우자에게 극기훈련이었다. 정말이지 여행은 딱 출발하기 전까지 계획하며 설레는 그 마음이 전부인 것을 알고 있다. 배우자는 함께 고생했던 그 시간들을 분명히 기억할 것이다. 그럼에도 전생에 역마살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 아내와 동행해 주어 고마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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