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00일 휴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원 May 18. 2022

매일 걷고 매일 명상한다

내가 나를 다시 키우는 100일의 휴가 - 1일 차

폭식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내게 폭식은 우울, 무기력과 같은 말이다. 우울감이 밀려오면 무기력 상태가 되고 평소 습관인 걷기와 단식, 습관으로 만들어가는 중인 명상도 외면한 채 깨어있는 시간 끊임없이 먹는다. 그렇게 먹고도 토한 적은 없으니(신기할 지경이다) 20대 때 심한 쳇기로 지하철에서 쓰러져 응급실에 2번이나 실려가고 내과 약을 하루 3번 1년이나 먹었던 전력이 있는 스트레스성 위염 환자로선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모를 일. 하루 만 보에서 만 오천 보를 걷고 근력운동을 꾸준히 하면 무엇하랴. 폭식이 시작되면 고칼로리의 음식들을 입에 끊임없이 밀어 넣고 거의 움직이지 않으니 며칠 새 5~6kg이 찐다. 그야말로 확찐자가 되는 건데, 몸도 변하고 내면과의 연결이 끊어져 인상도 변해버린 나를 깨달은 나는 스스로 선택한 며칠 간의 폭식에 대해 단식과 절식이라는 형벌을 역시 스스로에게 내린다. 이토록 중간 없이 극과 극을 오가는 인생이라니.


최근에도 3일간 폭식을 했다. 이번에 폭식을 부른 우울감의 원인은 일. 프로젝트 제안이 왔고 수락했으며 2시간의 미팅도 했다. 그리고 이틀 뒤 없던 일이 됐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라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급변하는 상황이 어색한 바닥도 아니건만, 이틀 전엔 없었던 언급과 새로운 제안이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래. 인정한다. 내가 받을 수 없는 제안을 하면서 그 자신도 미안해하는 대표에게 괜찮다며 인연 되면 다음에 또 보자고 꽤나 쿨하고 나이스하게 말했지만 실제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거다.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우울해하다 다시 배달앱을 열고 먹기 시작한 나.


3일간의 폭식을 끝내고 42시간의 단식을 하면서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밥벌이(일)와 나를, 그러니까 나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동일시했는지 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오래전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사실인데 그동안은 그게 당연한 것,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히 나는 밥벌이를 하지 않는 나를 쓸모없는 무가치한 존재라고 여겼다. 20여 년간 워커홀릭으로 살면서 자의로 쉬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데다 늘 성실했고 무리한 투잡 쓰리잡으로 온몸이 망가지는 걸 몇 번이나 경험했는데도 말이다. 프리랜서기에 일과 일 사이 있을 수밖에 없는 공백기 그 쉼의 시간을 의미 있게 즐기지 못하고 나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비난해 온 나는 갖지 않아도 좋을 불안과 초조함으로 스스로를 자꾸 절벽 끝으로 몰았다. 온전히 내 편이 되어 나 자신을 응원하고 보살피지 못했다. 자기 사랑은커녕 자기 혐오, 자기 부정, 자기 비난하기에 바빴다. 대역죄인도 아닌데 어찌나 부지런히 나 자신을 혐오하고 부정하고 비난해 왔던지 그 에너지로 다른 일을 했으면 자격증을 10개쯤은 땄을 것이다. 일을 할 때는 또 어떤가. 나는 늘 내가 굳이 책임지거나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도맡아 해왔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늘 무리했다. 언제나 완벽하려고 했다. 과한 책임감과 완벽주의로 무장했으니 그래 솔직히 일 잘한다는 말은 어디에서나 들어왔다. 인정받고 싶은 강한 욕구가 기저에 있었다는 걸 안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여전히 이걸 하고 저걸 해야 한다고, 이미 너무 늦었다고 왜 빨리 하지 않냐고 닦달하는 나에게 이제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더 이상은 200도 불 위의 웍으로 살 수 없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무엇을 성취하지 않아도 나는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이제는 정말 알아야 하지 않을까? 선택적 수용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고 존중하며 사랑하고 내가 누구보다 강력한 내 편이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 이제쯤은 정말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나에게 오늘이, 내일이 있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100일간의 휴가'를 내게 주기로 했다.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보지 못한 나에게 온전한 쉼을 주기로 했다. 40여 년 만에. 그리고 일기장을 펼쳐 이렇게 적었다. 


100일 휴가, 이건 한다. 꼭!

1. 매일 걷기, 명상, 근력운동, 일기 쓰기를 한다. 그 외 어떤 것도 강제하고 나 자신을 압박하지 않는다.

2. 나를 사랑하고 나를 존중하며 나를 응원하고 하나뿐인 강력한 내 편이 되어준다.

3. 고갈된 에너지를 자연 속에서 충전한다. 충분히 충전됐다고 느끼면 100일 전이라도 마침표를 찍으며 그에 주저함이 없기로 한다.

4. 모든 선택에 앞서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지 내면의 나에게 묻는다.



2022.5.14 양재시민의숲
양재시민의숲에서 - 나무를 오르는 청설모와 딱 마주친 눈. 씨익 웃어주었다.



'마음을 돌보는 100일간의 휴가' 그 첫째 날 나는 양재시민의숲으로 나를 옮겼다. 5월의 빛나는 초록 속에서 천천히 산책을 하며 바람과 햇살을 느끼고 도심 속 푸른 파도를 보며 온전히 쉬었다. 평온했다. 뭘 쓰고 싶은지도 모르고 이것도 쓰고 저것도 써야 한다고 닦달하며 스스로를 재촉했던 나에게서 벗어나기로 마음먹고, 뭘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은 채 그저 걷고 명상하며 내 마음을 돌보겠다고 다짐하니 더할 수 없이 가벼워졌다. 한참을 걷다 벤치에 앉아 일기장을 열었다. 그리고 나의 상처, 나의 경험, 나의 시련, 나의 우울, 나의 인연, 나의 어둠, 나의 무기력, 나의 예민함, 나의 과거, 나의 몸, 나의 현재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그래도 된다고. 열심히 살아왔으니 잠시 쉬어도 된다고. 이제는 나 자신을 그만 닦달해도 된다고. 나에게 평온을 허락해도 된다고. 나는 초록의 한가운데에서 심호흡을 하며 나 자신에게 반복해서 이렇게 말했다. 말해주었다. 





움직씨?

'사물의 동작이나 작용을 나타내는 품사 = 동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움직씨'를 입력하면 나오는 설명이다. 가다, 건너다, 모으다, 놀다, 까불다, 일어나다 처럼 행동을 뜻하는 동사 '움직씨'. '동사의 맛'이란 참 맛있는 책을 통해 알게 된 단어로, 나를 위해 나 스스로 움직여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붙인 이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