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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이민 7년, 여기선 가정을 꾸려도 될 것 같다

[이민자 인터뷰⑬] 뉴질랜드 오클랜드 최재영

우리(김병철, 안선희)는 10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하며, 해외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을 만났다.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 문화, 사람들 속에서 살아보는 것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기록을 공유한다.

여행을 잠시 중단하고 한국에 돌아와 무서운 맹추위에 떨고 있을 무렵, 적도 아래 따뜻한 나라에 살고 있는 인터뷰이가 한국으로 여름휴가를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처음 인터뷰 신청을 받았을 때부터 꼭 만나보고 싶었던 뉴질랜드 보트 빌더 최재영씨, 3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는 그를 서울에서 만났다.

여름휴가로 한국에 온 최재영씨를 2018년 1월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김병철

최재영(38세)

- 거주지 : 뉴질랜드 오클랜드

- 거주 6년

- 보트 빌더(영주권)

*모든 내용은 2018년 1월 인터뷰 시점이 기준입니다.


Timeline

2003년 CCTV 제조회사 입사

2004년 대학 졸업(컴퓨터공학 전공)

2005~2010년 반도체회사 근무

2011년 필리핀 어학연수

2012년 뉴질랜드 도착, 보트 빌더 과정 시작

2016년 요트 제조회사(Yachting Development Ltd.) 입사

2017년 영주권 취득

2017년 최재영씨 회사가 제작한 40미터짜리 배. 사진=최재영 제공

주중엔 개발자, 주말엔 다이버

빨리 졸업해 돈을 버는 게 효도라고 생각했던 재영씨는 대학생 3년 때 선배가 팀장으로 일하던 회사에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개발자)로 취업했다. 매일 회사에 놀러 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개발 일은 재밌었다. 하지만 몇 년 후 이직한 새 회사의 조직 문화는 그렇게 좋아하던 개발 일도 조금씩 싫어지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은 어땠나요?

컴공과 나와서 CCTV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아날로그 CCTV가 디지털로 바뀌는 시점인데, 내가 만든 제품이 나온다는 게 재미있었어요. 그러다 몇 달 임금이 체불돼서 반도체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됐죠. 처음 2년 정도는 괜찮았는데 (회사 생활이) 점점 힘들어졌어요.


저는 이직할 때쯤 스쿠버 다이빙을 시작해서, 주말에 항상 다이빙을 하러 갔어요.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퇴근해서 다이버들과 다이빙에 대해 얘기하는 걸 좋아했어요. 


근데 회사는 주말 출근이나 야근을 자주 하길 바라면서 윗사람과 마찰이 생겼어요. 또 회사에서 라인도 타야 하는데, 전 그런 걸 즐기지 않아서 일이 재미없어지더라고요. 


회사를 옮기면 좀 좋아질까 싶어 이직도 고민했는데, 마침 제가 있던 사업부가 없어져서 자연스럽게 정리해고가 됐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주말마다 다이빙을 다녔다. 다이빙 장비를 점검하는 최재영씨. 사진=최재영

-프로그램 개발은 적성에 잘 맞으셨어요?

개발만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한국의 직장 생활 자체가 안 맞았던 것 같아요. 밥도 다 같이 먹어야 하고, 회식도 필수 참석이고, 한국에선 ‘야 오늘 다 야근해’ 이러잖아요. 할 일이 없어도 ‘너무 빨리 퇴근하지 말고 책이라도 읽으라’는 거예요. 오후 6시 퇴근인데 5시에 회의 잡고.


인사 고과에 안 들어간다고 하지만 이사, 사장이 한 달 동안 야근을 얼마나 했는지 다 봤어요. 사장 마인드가 야근 많이 하면 ‘오~ 일 잘하네’였어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해서, 결과물이 안 좋아도 회사에 죽치고 있으면 일 잘 하는 거였죠. 야근을 안 하는 게 일 잘 하는 거 아닌가요?


-근데 어쩌다가 요트 제조할 생각을 한 거예요?

제가 다니던 다이빙숍 사장님이 조그마한 요트를 갖고 있었어요. 사장님이 요트를 가리키면서 ‘저 요트가 얼마짜리인지 알아? 저게 1억5000만원 정도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단순하게 ‘저걸 만들거나 디자인할 수 있으면 돈이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저는 주말만 바라보고 회사를 다녔어요.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새벽까지는 다이버로 산 거죠. 그러다 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고, 제 팀을 만들어서 다이빙을 다녔어요.

필리핀에서 최재영씨는 주중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다이빙 강사로 일했다. 뒤돌아 다이버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 최재영씨다. 사진=최재영 제공

지금은 많이 대중화됐지만 그때만 해도 다이빙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분들이 했어요. 그런 사람들이랑 다이빙하러 해외여행도 다니고, 저는 별거 아닌데 사람들이 ‘강사님’이라고 부르고요.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 돈이 생기더라고요. 그때 ‘내가 큰돈이 도는 산업에 있어야 나한테 떨어지는 돈이 많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작은 돈 도는 곳에서 있으면 나에게 떨어지는 것도 적구나’ 이런 게 겹쳐서 ‘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이빙을 좋아하셨다면 그쪽으로 갈 생각은 없으셨어요?

(개발 일이 그렇게 된 것처럼) 다이빙으로 돈 벌면 재미없을 것 같았어요.


-퇴사 전부터 이민을 생각하고 계셨나요?

CCTV 회사에 다닐 때 미국으로 첫 해외 출장을 갔어요. 그게 첫 해외여행이기도 했고요. 막상 미국을 가보니까 ‘왜 진작에 해외에 안 나갔을까’ 후회가 되더라고요. 좀 더 넓은 사회를 보고, 사는 방식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월급이 나오니까 계속 핑계만 생겼죠. 해가 지날수록 점점 잊혀지더라고요.

유니텍(Unitec) 1학기 때 딩기요트를 만들고 있는 최재영씨. 사진=최재영 제공

네덜란드로 착각하고 선택한 뉴질랜드

요트에 대한 꿈을 갖고 방법을 강구하던 그는 뉴질랜드의 요트학교에 가기로 방향을 정했다. 마침 정리 해고로 목돈이 생긴 그는 떠날 결심을 굳혔지만 중2 때 포기한 영어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요트 학교에 입학하려면 영어 성적이 필요해서 일단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이민 준비는 어떻게 하셨어요?

3년 동안 자료 조사하면서 천천히 준비했어요.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게 안 맞기 시작할 때부터 어느 나라가 요트를 잘 만드나 찾아봤어요. 8개국 리스트를 뽑았는데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언어를 새로 해야 해서 영어권으로 가기로 했죠. 그중 환율이 낮고, 졸업 후 워크 비자를 주고, 학교 다니면서 일할 수 있는 곳이 뉴질랜드랑 호주더라고요. 근데 당시 호주는 환율이 비싸서 도저히 갈 수 없었죠.


-뉴질랜드에 정착할 생각이었나요?

살러 간 건 아니고 전 세계에서 Unitec이 제일 유명하다니까 뉴질랜드로 간 거예요. 그때 환율은 영국도 비슷했지만, 영국은 졸업 후 취업이 어렵더라고요. 


간혹 뉴질랜드랑 네덜란드랑 헷갈려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가 그랬어요. 뉴질랜드가 유럽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결정한 거예요. 졸업하면 유럽에서 일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지도를 봤는데 오세아니아더라고요.(웃음)

lvlaomi/pixabay CC0 Creative Commons

-회사를 나왔지만 뉴질랜드에 요트 공부하러 간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약간 오기였어요. 가장 큰 건 회사 정리 해고되면서 자금도 모았고, 다시 취업하면 가진 걸 버리지 못하는 핑곗거리가 생길 것 같았어요. 근데 막상 뉴질랜드 가니까 별거 아니더라고요. 왜 진작 못 버렸을까? 일찍 버렸으면 영어라도 쉽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한국에서도 요트 제조를 할 수도 있나요?

한국은 아직 요트 산업이 작아서 박봉이에요. 개발 일도 좋아서 시작했는데 회사 다니면서 싫어졌잖아요. 한국에서 요트를 하면 사람들 때문에 싫어질까 봐 (외국행을) 결정한 거죠. 그리고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면 전 세계 어디서든 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영어는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중2 때 영어 선생님이 저를 그렇게 싫어했어요. 선생님과의 관계에 따라 과목 성적이 달라지기도 하잖아요. 수능 때도 영어는 포기했어요. 뉴질랜드에 바로 와서 영어를 배우려고 했는데, 아는 동생이 필리핀에서 주중엔 어학원 다니고 주말엔 다이빙 강사하라고 해서 그쪽으로 먼저 갔어요.


IELTS(영어시험)가 사람 피를 말리더라고요. 아예 기초가 없어서 8개월 동안 공부했어요. 그때 사진 보면 눈이 맛이 가 있어요. 첫 성적은 4.0. 정확하게 3개월에 0.5씩 올라서 5.5 입학 커트라인을 만들었죠. 


지금은 먹고, 살고, 일할 수 있는 만큼만 해요. 입사 초반에 동료들이 ‘주말에 뭐해?’하면 대답을 못했어요. 영어를 못하니까 6개월 동안 ‘나 잘거야’라고만 말했어요. 그래서 동료들이 저를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니까 주말에 잠만 자는 애’로 알았어요.(웃음)

최재영씨가 공부한 유니텍(Unitec Institute of Technology). 사진=최재영 제공

-학교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유니텍(Unitec Institute of Technology)이라고 학사 학위도 나오는 직업학교예요. 한국의 폴리텍이라고 보면 돼요. 4년 코스인데 처음 1년은 작은 배 두 척을 만들어요. 한 학기 동안 1.5m 배를 만들고, 그다음 학기엔 5m짜리를 만들어요. 나머지 3년은 배 설계를 전반적으로 배워요. 


보트 설계 쪽에 이력서를 돌려보니 보트 빌더 경력이 있는지 물어보더라고요. 이쪽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현장을 모르는데 어떻게 설계를 할 수 있냐’는 마인드가 있어요. 잘 나가는 디자이너나 설계사도 현장에서 일하다가 넘어가요. 배를 직접 만들어 보고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조합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설계도 제대로 할 수 있어요. 


-학교 공부는 어때요?

배우는 건 한국이랑 비슷해요. 근데 과제를 논문 수준으로 해야 해요. 한국에서 리포트 내면 인터넷에서 찾은 거 조금 수정해서 냈는데, 여기선 1000자를 쓰려면 책 5권 이상을 읽어야 해요. 배 신기술도 계속 나오니 잡지도 봐야 하고요.


3학년 졸업 과제로 1년 동안 배 한 척을 설계하고, 왜 이렇게 설계했는지 논문도 써야 해요. 5년 전에는 400자도 못 썼는데 8000자 넘게 쓰니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잘 몰라서 그러는데 요트 산업은 어떤 곳인가요?

저는 운이 되게 좋았어요. 요트산업이 사치 산업이잖아요. 유럽에서 이 산업이 잘 됐는데, 2009년에 (글로벌 금융위기로) 유럽 경제가 완전히 무너지고 뉴질랜드 요트 회사 70~80%가 문을 닫았어요. 저는 2012년 산업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할 때부터 배운 거죠. 마침 2017년 (세계 3대 요트대회인) 아메리칸컵에서 뉴질랜드가 우승하기도 했고요.

최재영씨가 과제로 만들었던 5미터짜리 배. 사진=최재영 제공

목수 아들, 보트 빌더가 되다

목수인 아버지는 ‘공부해서 본인처럼 되지 말라’는 의미로 어린 재영씨의 방에 목수 벨트를 걸어놨다. 멀리 유학까지 가서 몸 쓰는 일을 한다고 걱정하기는 어머니도 매한가지. 하지만 기술자에 대한 대우가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뉴질랜드에서 재영씨는 한국인의 성실함과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배우러 오셨다가 영주권까지 받으셨네요.

여기서 공부하다 보니 한국의 교육이나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알게 됐어요. 결국 뉴질랜드의 자연환경과 사회 구조에 반해서 영주권까지 받게 됐죠. 


-비자는 어떻게 진행했나요?

저는 관광비자로 들어갔다가 처음 4년은 학생비자로 있었어요. 학교를 졸업하면 1년 동안 일할 수 있는 ‘잡 서치 비자’(Post Study Work Visa)를 줘요. 워크비자로 갈 수 있는 발판을 찾는 기간인데, 저는 워크비자를 건너뛰고 바로 영주권을 신청해서 6개월 만에 나왔어요.


영주권은 점수제예요. 나이, 경력, 학력 같은 점수를 더해서 조건이 맞으면, 회사에서 ‘이 사람이 필요하다’는 문서를 써줘요. 그걸 내면 영주권이 나오는 거죠. 뉴질랜드에서 공부했고, 젊을수록 유리하죠. 오랫동안 일해서 앞으로 세금을 많이 낼 수 있는 사람에게 영주권을 주는 거예요.

2017년 제작했던 40미터짜리 배. 사진=최재영 제공

-회사에서 보트 빌더로 일하는 건 어때요?

설계를 하고 싶었는데 빌더를 해보니 더 재미있더라고요. 회사에서 2년 반 동안 40m짜리 배를 만들었는데 이게 300억원짜리예요. 배 나가기 날 새벽 4시까지 일하고 퇴근했어요. 사장이 ‘아침 출근하는 사람이 나머지 일을 하면 되니까 오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출근했어요.


제가 처음부터 제작에 참여한 배가 나가는 걸 너무 보고 싶었거든요. 저희 회사가 바다 바로 옆에 있어요. 크레인 5대가 40m짜리 배를 들어서 바다에 내려놓고 예인선이 와서 끌고 가더라고요. 그 광경을 지켜봤죠.

2017년 제작했던 40미터짜리 배. 사진=최재영 제공

-출근 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오전 6시 반 출근(오후 4시 반 퇴근)과 7시 출근(5시 퇴근) 중에 선택할 수 있어요. 금요일은 오후 3시에 퇴근하고요. 주 30시간 이상 일하면 풀타임 근무예요. 초과근로수당은 임금의 1.5배가 권고사항인데 계약에 따라 다르고요. 


-일과를 좀 설명해 주세요.

오전 5시 반에 일어나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출근해요. 오전 6시 반에 일을 시작하고, 9시 반에 15분 정도 쉬어요. 12시부터 점심을 30분 먹고, 오후 3시에 또 15분 쉬고요. 4시 반에 퇴근해서 거의 매일 2시간 정도 운동을 해요. 그리고 집에 가서 저녁 6시 반에 도시락을 싸고, 책이나 밀린 드라마를 보다가 11시 전에는 자요.


-키위(뉴질랜드인에 대한 별칭)들은 이 일을 잘 안 하나요?

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돈을 모을 필요가 없으니까 한국처럼 무리해서 하진 않아요. 사무직보다는 임금이 높지만 자격증을 따고 경력을 쌓기 전까지는 그렇게 많이 벌지는 못하거든요.


한국에서도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들이 빠진다고 해도, 한국 청년들이 힘든 일 안 하려고 하잖아요.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하는 일이 생각도 많이 해야 하고, 먼지 뒤집어쓰고, 힘드니까 현지인들이 잘 안 하려고 해요.


화학용품을 쓰다 보니 마스크, 점프슈트를 입고 일해요. 겨울엔 괜찮은데 여름에 뉴질랜드가 더운 날씨가 아닌데도 무거울 정도로 옷에 땀이 차요. 그걸 못 참죠.


저희 회사엔 사모안 같은 근처 섬나라 사람들도 있고 중국, 태국, 미국, 유럽 사람들도 있어요. 직원이 100명 정도인데 못 버티고 많이 나가요. 10명이 오면 1년 뒤에 2~3명 정도 남아요.

회사에서 작업 중인 최재영씨. 사진=최재영 제공

-여러 나라 사람들과 일해보면 어떤가요?

문화 차이가 조금 있는데, 백인들은 어느 나라 출신이든 경력이 쌓이면 얘기하면서 일하거든요. 근데 한중일 사람들은 계속 말을 걸어도 일만 해요. 오히려 ‘조용히 하고 일 좀 할래’ 그러죠.


제가 3, 4명 데리고 일하는 경우가 있어요. 뭐 가져오라고 하면 오고, 가면서 주변 사람들이랑 잡담을 해요. 다른 문화니까 이해하는데 팀장, 사장이 보면 속 터지죠.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요. 


제가 한국 군대 시스템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을 배우는 데 군대만 한 곳이 없어요. 팀장이 “다른 직원들도 다 한국 군대 보내야 해”라고 농담삼아 말하곤 해요.(웃음) 일을 열심히 하고 깔끔하게 한다고 한국인을 되게 좋아해요.


-요트 일을 하는 한국 분들이 많이 있나요?

직업 자체가 뉴질랜드에서도 많이 안 하는 분야예요. 보트 쪽에서 일하는 한국인은 제가 알기론 15~20명밖에 안 돼요. 잘 몰라서 안 하기도 하고요. 보통은 요리를 많이 하죠. 호텔 쪽으로 가면 영주권이 빠르게 나오니까요. 


투달러숍, 편의점도 많이 해요. 돈 있는 분들이 식당, 스시집 하고요. 미용사도 많이 오고, 네일 아트 해서 영주권 받는 분들도 있어요. 

뉴질랜드 제2의 도시인 오클랜드. 사진=최재영 제공

여기선 가정을 꾸려도 괜찮겠다

재영씨가 어린 시절 즐겨보던 주말의 영화 속 백인 아버지들은 항상 아이들과 저녁을 먹고, 공놀이를 하고, 낚시를 했다. 하지만 현실 속 아버지들은 주말 혹은 밤늦게야 얼굴을 볼 수 있었고,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 또한 드물었다. 하지만 뉴질랜드에 가보니 영화에서 봤던 단란한 가족을 꾸리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한국에서 삶과 어떤 부분이 달라졌나요?

회사 안과 회사 밖의 삶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어요. 물론 아주 가끔 잔업은 하지만 분 단위로 시급이 계산돼서 부담이 없어요. 퇴근 후나 주말에 회사에서 전화 올 일도 없어요. 사장, 팀장도 일을 안 하니까요.


뉴질랜드에선 야근할 일이 생기면 팀장이 돌면서 ‘오늘 혹시 시간 있어?’라고 물어봐요. 한국은 지시지만 여긴 부탁이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불합리한 것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한국 직장에서는 제가 정당하게 받은 휴가임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휴가 사유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결제받으려면 눈치를 봐야 하고 기간도 어느 정도 제한이 있고요. 여기선 월차나 병가를 쓰는데 이유를 만들 필요가 없어요. 2~3주 전에만 말하면 원하는 때에 휴가를 쓸 수 있고요.

회사에서 작업 중인 최재영씨. 사진=최재영 제공

-회사 일을 하면서 한국과 다르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나요?

합리적인 작업 방식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한국 직장에선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자를 가려내는 게 우선이라면 여기는 ‘어떻게 수습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재발 방지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요.


예를 들면, 제가 지금 회사에 들어간 지 6개월이 안 됐을 때 일인데요. 천에 본드를 입히는 작업을 하는데, 제가 재료 조합을 잘못해서 본드가 하나도 안 굳은 거예요. 아침에 출근해서 이걸 보고 ‘팀장한테 어떻게 말하나’ 엄청 고민했어요. 


저는 그때 워크비자도 받지 못한 그냥 외국인 노동자였어요. ‘아 잘리는 거 아닌가? 이대로 한국 가야 하나?’ 이런 고민들...


팀장이 왔는데 마침 사장이 옆에 있는 거예요. 얘기할 때 제 얼굴은 하얗게 되어 있었죠. 근데 팀장이 (뭐라고 하지 않고)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하더라고요.


그 이후에도 제가 정신을 못차리고 있으니까 ‘이건 너만의 실수가 아니라, 그걸 확인하지 않은 우리 모두의 실수다. 책임은 내가 진다. 그래서 내가 돈을 더 많이 받아가는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이 일이 있은 후 한국에서 방산 연구원들이 실수한 것에 대해 N분의 1로 배상하라는 기사를 봤어요. 한국은 ‘아직 저렇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뉴질랜드 북섬 중앙에 위치한 타우포(Taupo) 풍경. 사진=최재영 제공

-뉴질랜드도 가족 중심 사회죠?

모든 시스템이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가요. 한국에서 병가는 본인을 위한 것이잖아요?. 여기는 아내나 자녀나 사실혼 관계인 파트너가 아파도 병가를 쓸 수 있어요.


가끔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러 가족이 회사에 견학을 와요. 일하는 시간에 오는 거죠. 나중에 저도 여자친구나 부모님이 오시면 회사를 구경해도 된다고 해요. 문화 자체가 가족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에요. 이런 환경이라면 저도 여기서 가정을 꾸려도 괜찮겠구나 싶었죠.


-뉴질랜드는 어떤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조용하고 변화가 느린 나라예요. 잘 안 바뀌어요. 공사 한 번 하면 오래 걸리고요. 근데 전 그 여유로움이 너무 좋아요. 기본적으로 욕심만 안 부리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고요. 


내가 뭘하고 살든 어떻게 살든 남의 눈 신경 쓸 필요 없고, 노후의 많은 부분을 나라에서 책임을 져주기에 어르신들이 살기 좋은 나라이기도하고요. 


물론 단점도 많죠. 근데 저에게는 단점 보다 장점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아요. 여름 하늘은 진짜 이쁘고,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고 아름답죠.


보통 주변에 보면, 10~20대가 느끼기에는 너무 조용하고 심심한 나라고, 30~40대는 조용하고 차분한 나라라고 느끼더라고요 

뉴질랜드 오클랜드. 사진=최재영 제공

-한국은 왜 여유롭지 못하다고 느끼세요?  

노후보장이 안 되어 있잖아요. 다들 대학 가서 학자금 대출받으면 사회생활을 빚쟁이로 시작하죠. 적당히 돈 벌어서 결혼하고 돈 모을 때쯤 아기 낳고, 애 낳으면서 돈 모아서 또 대학 보내고. 나중에 (자녀) 결혼 자금도 해줘야 하고요.


또 한국은 남들이 하는 건 다 해야 해요. 우리나라 대부분 학생이 뭘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대학을 가요.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살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조카가 과학고를 갔는데 과외를 엄청하고 새벽에 들어와요. 애한테 저런 굴레를 씌워야 하나 생각이 들죠. 저렇게 해도 회사원, 안 해도 회사원인데, 남들이 다 시키니까 안 할 수는 없는 거죠.


제가 현지애들이랑 6개월 정도 같이 산 적이 있어요. 그중 한 명이 27살인데 대학교 1학년이었어요. ‘뭐하다가 늦게 대학에 갔냐’고 물어보니 고등학교 졸업하고 여행 다니고 바리스타도 했는데, 어느 순간 애니메이션이 하고 싶더래요. 그쪽 산업에서 일하려면 대학을 나와야 된다는 조언을 많이 받아서 대학을 갔다고 하더라고요.


뉴질랜드에는 ‘이 직업이 좋다 나쁘다’ 자체가 없어요. 어렸을 때 기억이 있어요. (목수인) 아버지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어떤 엄마가 애한테 ‘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고 하는 걸 직접 겪었어요. 


가끔 제가 퇴근해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장을 보거나 식당을 가도 여기는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요. 그냥 ‘저 사람을 저런 일을 하나보다’라고 생각하죠.

최재영씨가 공부했던 오클랜드 유니텍. 사진=최재영 제공

-뉴질랜드에서 6년 정도 살았는데 이방인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나요?  

언어가 가장 큰 것 같아요. 영어를 늦게 시작해서 그런지 아무리 말을 해도 문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요. 제가 스스로 벽을 쌓고 가는 것일 수도 있는데 살갑게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이랄까.


제가 클럽에서 금, 토요일 새벽 4시까지 컵이랑 병 치우는 바텐더 보조를 한 적이 있는데, 심지어 춤추는 클럽 비트도 달라요. 도대체 얘네는 어떤 장단에 춤을 추는지 모르겠어요.(웃음) 그런 차이들. 이제는 좀 느리게라도 이 나라 시스템, 문화에 적응하고 있기는 한데 뼛속까지 한국인인 건(소주 마시고 김치 먹어야 하는) 죽을 때까지 안 변할 듯싶어요.


-중장기나 노후 계획이 있으신가요?

막연하게요. 어차피 기술직이라 정년이 없어요. 같이 일하는 분 중에 61살도 있고, 70살도 있어요. 경력이 50년 되면 힘을 안 쓰면서도 하더라고요.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고, 70살 정도 되면 작은 공방 만들어서 가구나 작은 배를 만들면서 살고 싶어요. 


-뉴질랜드로 이민을 추천하시나요?

조용한 거 좋아하고 자연 좋아하시면 뉴질랜드가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 경험상 이민이나 유학 와서 가장 실패하는 사람들은 ‘내가 한국에선 어땠다’라고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에요. 다 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버티기 힘들어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 이건 뉴질랜드가 아니라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같을 거예요.


근데 ‘그런 것까지 다 버리고 하겠다’면 아직 문은 열려 있다고 봐요. 노동당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이민자를 줄이겠다고 했는데, 이민자가 줄면 세수가 줄기 때문에 조만간 다시 풀릴 것 같아요. 이민 문을 좁히면 이민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교, 유학원들이 다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거든요.

뉴질랜드 skeezes/pixabay CC0 Creative Commons
여름휴가로 한국에 온 최재영씨를 2018년 1월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김병철
필리핀에서 다이빙 강사로 일하던 최재영씨. 사진=최재영 제공
필리핀에서 다이빙 중 바다거북을 만난 최재영씨. 사진=최재영 제공
뉴질랜드는 호주 남동쪽에 있다. 이미지 = 구글맵스 캡처

[뉴질랜드]

- 기본 정보

o 인구 : 약 474만명

o 면적 : 27만㎢ (한반도의 약 1.2배)

o 민족구성 : 유럽인 75%, 마오리족 16%,아시아계 12%, 폴리네시아인 7%

o 언어 : 영어, 마오리어

o 종교 : 개신교 35%, 가톨릭 13% 

o 교민 : 약 3만3403명(2017년)

출처 : 외교부


- 이민 정보

o 뉴질랜드 이민성

o 뉴질랜드 이민성 한국어 홈페이지


글쓴이의 한마디 : 저희가 만난 분들의 이민 이야기는 그분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비교하지도 말고, 함부로 재단하거나 동경(혹은 훈계) 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저 사람은 저런 선택을 했구나’라는 정도의 시각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행복을 찾아 한국을 떠난, 이민자 11팀의 정착 이야기가 담긴 저희 책이 나왔습니다.

브런치에는 없고 책에만 실린 인터뷰도 있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구매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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