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서 지원하는 공동주택 공동체 공모사업, 작은도서관 멘토-멘티 지원사업에 도전해 보자고 제안한 가장 큰 이유는 열두 살 딸아이 때문이었다. 2020년 전학한 학교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2년간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5학년이 되어서야 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종일 마스크를 쓴 상태로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점심시간엔 친구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말없이 밥만 먹어야 했다. 아이는 학교를 감옥 같다고 말했고, 고민 끝에 자발적으로 언스쿨러(unschooler)가 되기로 했다.
딸아이는 날 닮아 매우 자유분방하다. 자기 고집이 있어서 무언가에 꽂히면 직접 경험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다.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음악으로 마을공동체 활동을 하는 ‘그레이트밴드’에 데리고 갔다. 혼자 기타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늘더니, 강습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선택한 학원이 ‘댄스 스튜디오’였다. 아이돌과 함께 무대에 선 분들이 강습을 해준다는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는지, 내 손을 끌고 가서 등록 절차를 밟았다.
딸아이는 학교를 벗어난 이후로 학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곤 줄곧 집에 붙어있었다. 스마트폰, 아이패드를 늘 손에 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반기엔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공공기관과 일하는 우리 회사 특성상 회계연도에 맞춰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야 하다 보니 하반기엔 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나가야 하는 일이 잦았다. 남편이 일주일에 두 번은 재택근무를 할 수 있어서 번갈아 가며 아이를 돌봤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 찾아오곤 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응팔)’은 우리가 꿈꾸는 마을공동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시절의 부산 동래구 명륜동 어딘가의 동네 골목은 지우개로 지운 듯 다 사라져 버렸다. 지금 그 자리엔 빼곡하게 아파트가 들어차 있다. 엄마 심부름으로 반찬통 들고 아랫집, 옆집 다녔던 기억이 선명하다. 학교 마치고 돌아온 집 앞 골목에서 친구들과 고무줄놀이하고, 옆집 마당에서 자라 담벼락 밖으로 뻗어 나온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 열매를 따 먹기도 했다.
딸아이에게 이웃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마을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던 육아와 양육, 일상을 나누고 살았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웠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그 따뜻한 정서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골목은 사라졌지만, 골목을 대체할 수 있는 공간이 작은도서관이라고 생각했다. 아파트 작은도서관을 활성화해 아이를 도서관에서 키우고 싶었다. 집에서 혼자 엄마,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불러 모아 마을에서 함께 돌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싶었다.
며칠 전 주차장에서 내복 차림으로 울면서 ‘집에 혼자 있기 무서워요’라고 했던 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