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유에 대하여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들도 많이 봤지만, 이번 영화는 좀 달랐다. 다른 영화들은 다 보고 참담한 마음뿐이었다면 이 영화는 그저 1944년 독일을 배경으로 한 사랑 영화를 본 느낌이랄까.
우선, 1940년대의 독일은 유대인뿐 아니라 순수혈통이 아니라고 여기는 흑인들에게까지 억압과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의 독일이라는 나라를 떠올렸을 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그 당시엔 버젓이 일어나는 일이었다고 하니, '그 당시'라는 게 막연히 오래 전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채 100년도 안된 이야기.
2020년 30살이 된 지금, 난 좀 억울했다.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말이다. 코로나 19만 아니었으면 가능했을 일들일 텐데... 마스크를 항시 착용해야 하고 사람이 많은 곳을 꺼려야 하는 일상의 불편함보다도 내 삶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억울함이 더 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을 주인공 레이나는 얼마나 억울했을지 생각해봤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피부색 때문에 독일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했을 때의 억울함은, 내가 이렇게 글 몇 자로 투덜거리는 것 이상의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겠구나. 그런 레이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해 줬던 건 역시나 가족. 사랑이다.
레이나는 나치 청년당원인 루츠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되는데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그것이 그녀가 살아가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건 루츠도 마찬가지. 지켜야 할 것이 생겼을 때 그들의 사랑은 더 강해지고 견고해졌다.
평범한 일상에선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기 어렵다. 사실 딱히 이유가 있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굳이 고민할 시간을 따로 둔다 하더라도 결론을 내긴 힘들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떤 하루를 살아가고, 또 어떤 하루는 버텨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내가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일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내가 살면서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을 꼽을 수 있다는 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므로.
레이나의 엄마가 레이나를 지켜냈듯이, 끝내 레이나는 자신의 아이를 지켜낸다. 그들은 1944년 독일의 만행을 이겨낸 산 증인이 된 것이다. 힘든 시간이 힘든 시간으로만 끝났다면 인간의 역사가 이렇게 길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매번 힘들었던 시간들 뒤엔 '업그레이드'된 내가 있었다. 지금도 코로나를 탓하고 있지만, 그 덕에 내 머릿속에만 있던 생각들을 글로 표현해봐야겠다는 결심이 들었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상황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찾을 수 있게 해 준 계기가 된 것이다.
나의 하루하루가 모여 내 삶이 된다 치면, 나의 하루가 의미 있는 하루가 되었으며 한다.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낸다는 건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나의 하루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때, 나름 상황 탓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런 상황이 있었기에 한층 더 업그레이드됐을 내일의 나를 위한 마음 연습 중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