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저, 우리 그 자체일 뿐이다
영화 "캐롤" 은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아직 여성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 여기고, 동성애는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그 시대. 그 시대의 남자들은 여성을 가리킬 때 이름이 아닌 '누구네 와이프' 라고 지칭하고, 순종을 요구한다. 여자들 역시도 '남편이 마음에 안 들어할 행동'을 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 꽉꽉 막힌 시대에서, 영화의 두 주인공 테레즈와 캐롤은 서로 불타는 사랑을 한다.
주인공 테레즈는 남자친구 리처드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무미건조하며, 지루하기 짝이 없다. 매일 백화점에 출근해서 손님들을 응대하는 나날들의 연속. 그래서인지 그녀의 표정은 늘 비어 있고, 매사에 시큰둥하다. 남자친구가 여행을 가자고 해도 그저 머뭇거릴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캐롤이 나타난다. 어린 시절의 그녀처럼, 인형보다 기차 세트에 더 관심을 보이는, 낯선 여자는 그렇게 그녀의 삶에 갑작스레 침투한다.
그녀와의 만남은 짧았지만, 테레즈는 놀랍도록 쉽게 캐롤에게 이끌린다. 우연한 계기로 함께 식사를 하고, 자연스레 캐롤의 상처를 엿보게 되면서 둘은 순식간에 가까운 사이가 된다. 사진가의 꿈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찍지는 못했던 테레즈는, 자연스럽게 캐롤의 사진을 찍는다. 뿐만 아니라 캐롤이 테레즈한테 여행을 제안하자, 리차드가 그렇게 신혼여행 이야기를 해도 꾸물거리던 테레즈가, 그녀의 제안에는 곧잘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그 둘은 훌쩍,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그렇게 가까워지는 와중에도 테레즈는 혼란스러워한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의문조차 품지 못했던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 그런 그녀에게 친구 대니는 한 마디를 건넨다.
그 사람에게 끌리거나 끌리지 않는 이유는 알 방법이 없어. 우리가 알 수 있는건 그 사람에게 끌리느냐 끌리지 않느냐 하는 것 뿐이야. 물리학 같은 거지.
대니의 이 한 마디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하나의 울림을 던진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굳이 그 이유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그 대상이 동성이든, 이성이든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것에는 당위도 필요 없고, 이유도 필요 없다. 그냥 사랑하면, 그리고 그것이 진정 사랑이 맞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테레즈뿐만 아니라 캐롤 역시 끊임없이 갈등을 반복한다. 그녀의 경우엔 두 가지의 정체성이 충돌하는데, 바로 엄마로서의 자신과 동성애자(혹은 양성애자)로서의 자신이다. 그녀는 분명 자신의 사랑을 찾고자, 끌리는 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혼중인 남편 하지가 양육권을 빌미로 그녀를 협박하자, 캐롤은 갈등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성애로 인해 잠시 테레즈를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말미에, 그녀는 결국 엄마로서의 자신보다 캐롤 본인으로서 살아가기로 한다. 자신의 성적 지향을 부인하기만 하면 딸 린디의 양육권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캐롤은 이렇게 외친다.
하지만 날 부정하면서 산다면 린디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캐롤은 결국 깨달은 것이다. 스스로를 계속 부정하는 사람은 좋은 엄마조차 될 수 없다는걸. 그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오히려 딸에게 악영향만 준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홀로 서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본인의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일 뿐이니까, 그것이 죄는 아니니깐 말이다. 그렇게 캐롤은 10년동안 여성으로서, 성소수자로서의 자신을 옭아메던 굴레를 벗어던진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도다른 흥미로운 점은 테레즈의 변화이다. 영화 초중반부의 테레즈는 그저 수동적인 존재였다. 캐롤과의 식사에서 메뉴를 고를 때도, 캐롤이 여행을 제안하거나 첫날밤을 가질 때에도 늘 그녀는 수동적인 위치에서 그저 승낙하거나 캐롤을 따라갈 뿐이었다. 영화 초반의 테레즈는 캐롤이 주는 담배를 멋쩍게 받아서 피운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둘이 만나서 식사할 때 그녀는 캐롤의 담배를 단칼에 거절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캐롤에게 스스로 찾아간다.
분명 테레즈와 캐롤의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테레즈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고, 캐롤은 끊임없이 딸을 그리워할 테니깐. 하지만 이것이 꼭 그 둘만의 고민은 아닐 테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정신병이라고 재단하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름이 아닌, '누군가의 아내'나 '누군가의 엄마'로 부르는 사회. 그런 사회이기 때문에 둘은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1950년대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장 대로변에서 남자 둘이 팔짱을 끼고 걸으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기도 하고, 여전히 가부장제의 잔재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 자신으로서 있을 뿐인데, 사회의 수많은 시선들이 그들로 하여금 숨어들게 만든다. 앞서 "월플라워" 리뷰에서는 우리가 우리로서 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사람들이 자기 자신으로서 설 수 있도록, 그들의 존재를 지우지 않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