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PD 지망생의 고민
0.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면, 그중에서도 운 좋게도 일이 거의 없는 곳에서 근무하면 시간이 차고 넘친다. 그 넘치는 잉여시간에 나는 글을 읽거나 이런저런 영상들을 보곤 한다. 영상은 처음엔 영화를 보다가 트위치 게임방송으로, 요즘엔 분야를 넓혀서 라디오 방송들까지도 보곤 한다.
1. 가장 먼저 느낀 점은 연출의 중요성이었다. 생각보다 목소리 좋고 연기가 되는 사람들은 많다. 소위 말하는 "포텐" 으로 치면 공중파 라디오 진행자 못지않아 보이는 스트리머들이 꽤 있다. 다만 그들에겐 따로 PD나 작가가 없다 보니 연출 면에서 아쉬운 부분들이 눈에 밟히곤 한다.
솔직히 학교 방송국에서 방송을 만들 땐 연출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몰랐다. 그냥 내가 생각하는 목소리에 가장 근접한 아나운서를 캐스팅해서, 막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으면 어물쩡 넘어가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전적으로 나의 게으름이었다.
대본의 디테일을 살려 주고, 진행자의 입에 맞는 말로 살짝 바꿔 주는 작가. 그리고 그 사연 또는 내용에 가장 어울리는 목소리를 끌어내주는 PD의 연출. 거기에 적절한 배경음악과 선곡까지. 방송국을 나간 지 일년 반이 다 되어서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라디오PD의 역할을 깨달았다.
2. 그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두려움이었다. 방송마다 수백명, 많으면 천 단위의 사람들이 매일 각자의 스트리머들의 방송을 보러 온다. 그들은 채팅으로 진행자와 소통하고, 돈만 내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송출'할 수도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그렇다면 이제 기성 라디오에 남은 장점은 뭐지?"
소통은 인터넷 방송이 훨씬 직접적이다. 채팅과 사연의 홍수 속에 나의 목소리가 흘러가 버리는 기성 방송과는 달리, 트위치에선 일정 금액만 지불하면 "도네이션" 이란 포맷으로 방송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띄울 수 있다. 말뿐 아니라 사진이나 영상, 음성까지도. 거기에 이어지는 스트리머의 감사 리액션은 덤. 읽어줄지 무시당할지, 아예 눈에 들어올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라디오 방송에 문자를 보내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낫지 않나?
컨텐츠의 자유도도 천지차이다. 일단 인터넷 라디오 방송은 여차하면 영상이란 수단을 쓸 수도 있다. 실제로 라디오만 전문으로 하는 스트리머보단 게임방송 등을 병행하는 이들이 더 많다. 기성 라디오랑 비교하자면, 오디오 다큐멘터리와 뉴스를 제외한 모든 컨텐츠를 인터넷 방송이 제공할 수 있다.
결국 기성 라디오가 인터넷 방송에 확실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부분은 "진행자와 게스트의 유명세"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면 PD의 역할은? 방송 내적에서 우위를 점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끽해야 PD 개인의 노력으로 퀄리티를 높이는 정도고, 매체로서 라디오는 인터넷 방송에 비해 나을 게 없어 보인다. 데이터 소모량이 적고, 좀 더 유명한 진행자가 나온다는 것 빼고는.
3. 여태 내 마음속의 1순위 꿈은 라디오 PD였다. 현실적으로 되기가 힘들어 TV쪽이랑 같이 기웃거리고 있긴 했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무조건 하리라 믿어왔었다. 하지만 최근 접한 인터넷 라디오들 탓에 그 꿈이 바뀔 것 같다. 내가 사랑해 왔던 것은 라디오라는 매체였는데, PD로서 이 기울어가는 매체를 다시 되살릴 자신이 없다. 방송 한두개 정도야 어떻게든 잘 만들 순 있겠지만, 그건 내 방송을 살리는 거지 라디오를 살리는 것이 아니니깐.
결국 라디오는 전시나 재난시에 쓰일 비상용 매체로 전락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새로운 매체 앞에서 쓸쓸히 잊혀질거란 회의감에,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도 작으리란 무기력함에 진로에 대한 고민이 더더욱 깊어진다.
<예시 방송>
RADIO ; 가만히 눈을감고: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oj9gPSXE7BSgUTzd932hwrH6PpZ04xV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