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조심히 들어가." 꽤나 일상적인 말이다. 늦은 밤 술자리를 마치고 각자 집에 들어갈 때, 밤에 부모님과 통화할 때, 우리는 자주 이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을 듣는다. 대부분에게는 너무 익숙해져 그저 관용어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표현이다.
1. 하지만 최근 이 말이 재평가되는 분위기다. 여성계를 중심으로 '조심히 들어가' 라는 말이 또 하나의 폭력이고, 2차 가해라는 주장이 퍼지고 있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적던 많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저 말은 지금까지 'Good bye" 정도의 의미로만 알고 있었는데, 내가 2차 가해자라니. 이들은 여성계의 주장에 대한 몰이해 반, 느닷없이 2차 가해자로 지목된 데에 대한 억울함 반으로 그 주장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2. 그런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서로의 주장 사이에 흐릿함이 있었다. 안부 인사와 2차 가해 사이의 미싱 링크. 대체 어느 부분에서 일상적인 언어가 가해자의 언어로 바뀌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하고, 여성계의 의견을 찾아보았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조심하지 그랬어"로 변화한다. 이는 피해자를 위축시키고, 사건의 초점을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옮기는 언어다. 마치 '조두순 사건' 이 '나영이 사건'으로 알려지는 것처럼.
3. 사실 "조심하지 그랬어" 는 내가 그 누구보다도 많이 들으면서 컸던 말이다. 워낙에 빈틈이 많고, 술을 단 한 잔도 먹지 않아도 취한 듯 정신을 놓고 돌아다니는 탓에, 자잘하게 넘어지거나 옷을 버리기도 하고, 무릎이 까지거나 발목이 삐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내게 '조심하지 그랬냐'며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곤 하셨다.
그런데 딱 한번 다쳐서 왔음에도 어머니가 별말이 없으셨던 적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축구를 하다가 눈을 다쳤다. 눈쪽 혈관이 터졌는지, 세상이 불그스름하게 보였고, 나중엔 핏물이 고여 있는게 보일 정도였다. 당연히 입원을 했고, 보름 가량을 병원 침대에 누워 안대를 하고 지냈다. 그 때의 어머니는 조심하지 그랬냐며 나무라지 않고, 되려 먹고 싶은 게 있냐, 불편한 건 없냐며 날 챙겨 주셨던 기억이 난다.
4.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조심하지 그랬어" 는 피해자의 부주의가 섞여 있으면서도 그 정도가 경미한 사고에 쓰는 말이다. 즉 성범죄 피해자에게 '조심하지 그랬어' 라고 말하는 것은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무릎이 까지거나 옷을 버린 정도에 그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발화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꽤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한다. 그 안일함은 피해자에게는 또다른 상처로, 또다른 트라우마로 다가온다. 결국 상처입은 이들에게, 혹은 상처를 입을지 모르는 이들에게 '조심히 들어가' 라고 하는 것은, '조심하지 그랬어' 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따라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학교폭력 피해자에게 "처신을 잘 하지 그랬어." 라고 말하거나, 학교에 가는 아이들에게 "처신 잘 해라." 라고 하는 것은 또다른 폭력이다. 이 부분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다. 허나 밤늦게 귀가하는 이들에게 "조심히 들어가" 라고 하는 것이 폭력이라는 것은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다. 결국 같은 맥락, 같은 개념인데도 말이다. 모든 발화는 청자 중심이어야 한다. 아무리 별 의도가 없든, 혹은 좋은 의도일지라도, 그것이 피해자에게 잘못 전달된다면 소용이 없다. 그러니 다들 좀 조심히 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