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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BRIDGE Apr 24. 2018

무비 브릿지 - 주토피아

한병철의 "피로사회" 통한 주토피아 비틀어 읽기

    지난 2016년 개봉한 주토피아는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 차별과 역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풀어내었고,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이룰 수 있다(Everyone Can be Everything) 이라는 메세지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차별과 편견이 없는 세상 속에서는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마치 제목처럼, 주토피아가 그리는 사회는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라는 점을. 실제로는 차별과 편견, 유리천장으로 가득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런 메세지는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착취하게 한다는 점을 말이다. 

    철학가 한병철의 저서, '피로사회'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성과사회이다. 불가능을 거세하고, "할 수 있음" 으로만 채워진 사회. 그 사회 속에서 개인은 끊임없이 노력한다. 할 수 있다고 배웠으니까,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은 오롯이 개인의 탓이니까 계속해서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누구든 자신의 꿈을 이루고, 성공할 수 있는 사회. 영화 '주토피아'에서 끊임없이 말하는 사회이다. 그 사회 속의 개인은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구조적 문제가 아닌 스스로에게서 찾는다. 본인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충분히 시도하지 않았던 탓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며 자책한다. 그렇게 불나방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회 속으로 뛰어들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토피아' 안에서도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한 인물이 있다. 바로 작중 악역으로 등장한 "벨웨더." 그녀는 영화 내에서 소형동물들이 받는 차별과 멸시를 상징한다. 명색이 부시장임에도 초라하고 더러운 집무실에서 잡무를 처리하며, 시장인 사자 라이언하트는 그녀를 양들의 표를 얻기 위한 얼굴마담 정도로만 여긴다. 그 결과 극단적인 선택을 하긴 했지만, 벨웨더는 작중에서 유일하게 주토피아 사회의 부조리함을 직접적으로 지적한 캐릭터였다. 주디가 닉에게 괜찮다고 할 수 있다는 이상주의적인 이야기를 할 동안, 그녀는 사회 시스템을 뒤집기 위해 계획을 짰고, 실행에 옮겼다. 다만 그 방법이 극단적이었다는 점에서, 시스템의 개선이 아닌 전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을 뿐이다. 

    실제로 영화는 현실을 너무 순진하게 바라본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여성 경찰 한 명이 중대한 사건을 해결한다고 해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 일순간에 뒤집히지 않는다. 사건은 사건일 뿐 그 이후 이어지는 수많은 사회 개선 요구들이 있어야만 사회가 변하는 것이다. 주토피아가 그리는 세상이라면 이십육년 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안전불감증이 사라졌어야 했고,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은 후에 여권이 급격히 신장됐어야 했다. 하지만 안전불감증은 사라지지 않아 이후 삼풍백화점이나 세월호 사건 같은 참사들이 벌어졌고, 강남역의 그 끔찍한 살인사건 이후로도 우리 사회의 여성인권은 제자리걸음이다. 이런 현실의 차가운 면은 덮어둔 채, 그저 "너는 할 수 있다." 라는 속없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은 이상주의적 소시오패스나 할 법한 일이다. 


    물론 주토피아는 디즈니에서 만든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다.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우리 사회의 그림자까지 보여주면서, 권선징악이라는 고전적인 주제의식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벨웨더 정도의 캐릭터가 최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 관객의 입장에선, 그리고 영화의 여운이 어느 정도 가신 지금 이 시점에선 뒷맛이 찝찝하다. 마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 "아니야, 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유리천장 같은 건 없어." 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2년만에 다시 본 영화의 색깔은 사뭇 다르게 비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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