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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BRIDGE Sep 02. 2016

무비 브릿지 - 최악의 하루

솔직한 거짓말에 대한 위로

    그런 날이 있다. 하루 종일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는 날. 모든 일이 주머니 속 이어폰마냥 꼬여 버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날. 그래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고, 그저 가라앉는 느낌뿐인 그런 날 말이다. 김종관 감독의 신작 "최악의 하루"는 그런 하루를 보낸, 그런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위로를 전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산뜻하고 유머러스한 톤을 유지한다. 전반적으로 카메라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인물들만 움직이는 정중동의 미가 살아 있다. 이는 때로는 마치 한 편의 사진전을 보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며,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신선한 상태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는 오프닝 시퀀스나, 작중 등장하는 여러 카페 씬들의 수직샷에서 드러나며, 후자의 경우는 인물들이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많이 드러난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그 '정지된 카메라'의 효과가 극대화되는데, 나도 모르게 주인공이 되어 욕지거리를 내뱉게 된다. 마치 웹툰 "찌질의 역사"를 그대로 영화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영화 전반부의 하이라이트. 관객까지도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비록 카메라워크와 음악으로 산뜻하고 유쾌하게 풀어가긴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스토리는 전혀 유쾌하지 않다. 두 주인공, 은희와 료헤이는 정말 최악의 하루를 보낸다. 배우와 소설가라는 직업 탓일까. 두 인물은 모두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 은희는 앞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가면을 바꿔가며 살아간다. 때로는 털털하게, 때로는 차분하고 무섭게, 또 어떨 때는 푼수기 있는 소녀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하지만 그 가면들이 서로 엇갈리고 섞이는 순간, 은희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료헤이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물을 지어내고, 그들의 이야기를 지어내지만, 결국 그것은 우아하게 포장된 하나의 거짓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점을 지적당하자, 작가로서 그가 갖고 있던 정체성이 망치로 두드려맞은 듯 무너진다. 은희와 료헤이의 최악의 날은 결국 그들의 거짓말이 들켜버린 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거짓말 위에 세워진 그들의 정체성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붕괴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붕괴를 지나 결국엔 해피엔딩을 맞이할 것이란 희망을 심어 준다. 하루종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지쳐버린 둘은, 그들 생에 있어서 가장 솔직한 거짓말을 하게 된다.

    료헤이와 은희의 거짓말은 거울에 비교할 수 있다. 거울 맞은편 상대에 맞춰 이야기를 꾸며내기 때문이다. 여지껏 타인을 비추는 거울이었던 은희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마주한 채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소설 속 인물만을 비춰 왔던 료헤이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비춰 본다.

    하지만 어떻게 첫 술에 배부를까. 이제 겨우 자신에게 솔직해진 그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까지 솔직해지기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오히려 가장 낯선 이로 만났을 때, 과거 자신이 해 왔던 거짓말을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부담 없이 솔직해진다. 본인들에게 낯선 언어인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은 그 솔직함에 날개를 달아주기까지 한다. 그렇게 영화를 이끌어가던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져 서로 공감하는 장면은 최근 본 한국영화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에게 힘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영화는 그 둘의 교감에서 그치지 않고 관객들과의 교감까지도 시도한다. 감정선이 극에 달할 때쯤 영화는 급작스레 도시의 풍경들을 보여 준다. 남산 타워, 서울의 거리 같은 것들을. 관객들을 처음엔 낯섦을 느끼지만 이내 그 익숙한 공간 속에 있을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도시 안에서 주인공들처럼 거짓말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늘 솔직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쓰고, 스스로를 담아내야 할 때 그러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말이다. 그 사진같은 짧은 장면들을 거쳐 두 인물이 마주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주인공들에게서 우리 스스로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전까지의 시트콤스러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나의 이야기' 라는 생각으로 서사에 빠져들어간다.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더더욱 훌륭하다고 할 만하다. 단지 두 주인공의 이야기만을 마무리짓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관객들의 이야기까지 담아낼 수 있는 그런 결말이라 생각한다.


 총평: 오랜만에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 8.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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