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어두울수록 빛나는 빛, 밝을수록 사라지는 빛
바의 은은한 조명이 잔 위에 내려앉아 금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내 마음은 어쩐지 한없이 공허했다. 아리아나는 내 옆에서 와인잔을 천천히 돌리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창밖을 바라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불멸의 도시 샤이닝 시티. 모두가 꿈꾸던 천국 같았지만 지금 내 눈에는 거대한 감옥처럼 보였다.
"이든."
아리아나의 목소리가 귀에 스며들었지만, 나는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든!"
조금 더 크게 부르는 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이 현재로 돌아왔다.
"어. 뭐라고 했지?"
아리아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분명 걱정이 서려 있었다.
"요즘.. 무슨 일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했다.
"예전 같지가 않아. 원래 너는 이성적이고 감정에 흔들리는 법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 뭔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
나는 대답 대신 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차가운 알코올이 목을 타고 내려갔지만, 가슴속 공허함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공허가 점점 더 넓게 퍼지는 느낌만 들었다.
"아리아나."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잔을 천천히 돌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래 로그인하면 기존의 신체는 폐기되잖아? 폐기 전에 기억은 모두 삭제되고 기억이 사라진 사람은 그대로 처리되지."
아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원래 규정이 그렇지. 그래야 서로 충돌이 없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흘리며 말했다.
"기억은 없지만.. 생체적으로는 아직 살아 있는 거잖아.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고.. 여전히 인간인데. 결국 그를 죽이는 게 되겠지. 그럼.. 그건 살인이 아닐까?"
아리아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눈동자가 잔 속의 술처럼 흔들렸다.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우린 늘 그게 당연한 거라고만 배워왔으니까. 로그아웃된 몸은.. 그냥 껍데기라고."
나는 잔을 비우며 씁쓸하게 웃었다.
"껍데기라.. 하지만 언젠가 그 껍데기가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녀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
"만약 기억이 있으면 살아 있는 거고 기억이 없으면 죽은 거라면.. 그렇다면 기억을 지우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살인이 되는 거 아닐까?"
아리아나는 시선을 내리며 숨을 고르듯 잠시 말이 없었다. 마치 그 질문이 마음속 깊은 곳에 조용히 내려앉는 것처럼.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말했다.
"어차피 내 몸이고.. 그 모든 절차에 내가 다 동의한 거잖아. 기억을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것도 결국 내가 선택한 거니까 살인은 아닌 거지."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아리아나.. 너는 로그인을 몇 번 해봤지?"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했다.
"로그인은 두 번 해봤어. 그런데 왜?"
"두 번째라.."
나는 무심코 잔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아리아나, 넌 로그인한 삶이 만족스러워?"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만족스럽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몸은 점점 더 완벽해지고. 원하면 언제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어. 누구나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 말은 맞았다. 하지만 나는 묘한 공허함을 느꼈다. 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곧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
"뭔데?"
그녀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있는 듯 말하자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새로 로그인하고 난 뒤부터 가끔 이상한 꿈을 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인데, 마치 내가 실제로 했던 것처럼 생생해. 감정까지 그대로 느껴져."
나는 잔을 내려놓고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어떤 꿈인데?"
"처음 로그인 이후로는.. 나는 달리고 있었어. 누가 나를 쫓는 것 같았는데.. 숨이 가쁘고 발이 미끄러지고 그런데도 달려야만 하는 꿈이었어. 그 꿈을 계속 반복해서 꿨어. 마치 그게 나의 과거인 것처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한 꿈이 무엇인지 이미 나는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멸의 영광 뒤에 가려진 진실. 로그인할 때마다 지워지고 덮어 씌워지는 기억. 그리고 그 틈에서 흘러나오는 기억의 잔상들. 잔 속의 칵테일이 천천히 흔들렸다. 아리아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로그인한 후엔 꿈이 달라졌어. 이번엔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사진을 찍으려는 장면이었어. 나의 옆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고 앞에는 아직 어린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었지. 그런데 이상하게, 전부 내가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도, 분명 기억 속에 없는 사람들이었는데도 낯설지 않았어. 그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살아온 가족처럼 느껴졌어…”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녀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결혼도 하지 않았고 어린 아이를 본적도 없어. 여기서는 모두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까..”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아리아나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알고 있어야 할 이야기를 왜 묻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우리 도시는 각 계층마다 허용된 인구수가 정해져 있잖아. 그래서 법적으로도 허가 없이 아이를 낳는 건 금지되어 있어. 만약 규정을 어기고 아이를 낳으면 강제로 정부가 빼앗아간다고 들었어."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이를 가지면 안 되는 법이라니. 그런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나는 몰랐다.
그때 아리아나가 조용히 말했다.
“근데 어차피, 아이를 갖고 싶어도 우리는 불가능해.”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가지고 싶어도 불가능하다고?.”
“DNA 단계에서부터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설계돼 있어. 그래서 서로가 원해도 가질 수가 없어.”
유전적으로 막아 두었다니. 이게 과연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런데…”
아리아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아있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왜?”
아리아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든, 만약 누군가가 이곳에서 법을 어기고 아이를 갖게 된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아이가 생긴다면? 법은 법이니까, 결국 법대로 해야겠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아리아나는 시선을 피하며 짧게 웃었다.
“...아니야. 그냥 이 법과 관련해서 너의 생각이 궁금해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끝까지 어딘가 맺혀 있었고 꺼내지 못한 말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이 멀어졌다.
"그런데.. 그 꿈속 아이들은 마치 내가 직접 낳은 아이처럼 느껴졌어."
아리아나가 떠난 뒤에도 나는 바에 앉아 있었다. 잔 속의 칵테일이 흔들리며 조용히 금빛을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로그인과 폐기를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그 단순한 절차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오래된 몸은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고.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고. 그저 규칙이니까 괜찮다고.
하지만 그 규칙 뒤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다. 누군가의 삶이 깎여 나가고 지워지면서 만들어진 시스템. 겉으로는 매끄럽고 합리적인 질서 같지만 그 빛나는 질서가 서 있는 바닥 어딘가에는 어둠이 깔려 있다. 나는 잔을 굴리며 천천히 생각했다. 그녀가 말한 영생. 그 화려한 혜택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희생 위에서만 유지되는 걸지도 모른다. 섀도우 시티의 사람들, 혹은 그 너머의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며. 아리아나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굳이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여기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사니까. 그녀가 스스로를 설득하던 그 말이 오래 귓가에 맴돌았다.
결국 아무도 그런 희생 위에서 자신들의 편리함이 세워져 있다는 걸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빛나는 도시의 불멸을 당연한 권리처럼 누리면서도, 그 뒤편에서 얼마나 많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는 보려 하지 않는다.
나는 칵테일을 한 모금 삼키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편리함과 화려함이란 언제나 누군가의 그림자 위에 서 있기에 가능하다는걸 이 도시의 시스템이 증명하고 있었다. 이 도시가 누리고 있는 불멸도 결국, 보이지 않는 희생의 불꽃 위에서만 타오르고 있었다.
"요즘 고민이 많아 보이네요."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텐더 아서였다. 그는 이곳의 그림자 같은 존재. 샤이닝 시티 건국 후에 최초 프로젝트 지원자 중 하나였다. 그는 로그인을 자주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에, 외모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략 마흔 초중반 정도 되어 보였고 머리카락 사이로 흰빛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아서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잔을 닦으며 말했다.
"다른 도시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자주 오시지는 않았죠. 그때는 이렇게 고민하는 얼굴을 본 적이 없던 거 같아서요."
그는 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잠시 나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네요."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다른 사람 같다고?"
아서는 미소를 지었다.
"네. 특히 아리아나양을 바라볼 때 그렇습니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조용히 물었다.
"아서.. 내가 이제 하는 말은 비밀로 할 수 있겠나?"
그가 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날 흘깃 보았다.
"비밀이요? 당연하죠. 안 그러면 절 가두실 거잖아요?"
농담 같은데 묘하게 진심이 스친 말투였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잔을 굴렸다.
"원래 로그인하면 기존의 신체는 폐기되잖아. 폐기 전에 기억은 모두 삭제되고 기억이 없어진 사람은 그대로 처리되지. 그런데 만약 폐기되지 않고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면 결국 두 명의 같은 사람이 존재하게 되겠지."
잠시 바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아서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중 누가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조금씩 떨렸다. 잔 속의 칵테일이 천천히 흔들렸다. 아서가 잠시 침묵하더니 낮게 물었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새로 로그인해서 나온 사람이 진짜인지, 아니면 몸을 유지한 채 살아남은 쪽이 진짜인지를 묻는 거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앞의 술빛이 일렁이며 내 안의 혼란을 비추는 것 같았다. 아서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하죠. 기억이 있는 쪽이 진짜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억은 복사할 수 있어요. 같은 기억을 가진 두 사람이 있다면, 둘 다 진짜일 수도 있죠."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무엇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정해야 하지?"
아서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아마.. 선택 아닐까요? 똑같은 기억을 가진 두 사람이라도, 지금부터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다르면 그 순간부터 다른 존재가 되겠죠."
그 말은 마치 내 가슴 깊숙이 박히는 송곳 같았다.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나는 진짜 이든 맥스웰이 될 수도,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서가 마지막으로 조용히 말했다.
"내가 누군지는 남들이 정하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정하는 거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당신은 여전히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죠."
그 말에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잔 속의 위스키가 천천히 흔들리며 마치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비추는 듯했다.
아서는 잔을 닦던 손길을 멈추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불꽃을 생각해 봐요. 장작 하나 위에 타오르는 불은 그 장작이 있기에 존재하죠. 그런데 그 불을 다른 장작에 옮겨 붙이면, 두 번째 장작도 불타기 시작합니다. 그럼 두 불은 같은 불일까요, 아니면 다른 불일까요?"
나는 칵테일에 잠시 입술을 대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서가 이어서 설명했다.
"분명 두 번째 불은 첫 번째의 불을 이어받은 같은 불이에요. 하지만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이미 다른 불이죠.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기억이 다른 몸에 옮겨 붙으면 처음엔 같은 불씨로 시작하지만 곧 전혀 다른 삶으로 번져나갑니다. 불꽃은 매 순간 다른 모양으로 타오르니까요. 기억도, 정체성도 그렇게 변화합니다."
그는 내 시선을 마주하며 조용히 덧붙였다.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과거에 묶여 있지 않아요.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불꽃으로 타고 있는가죠. 새로운 경험, 새로운 선택이 쌓일수록 불은 잠시 더 크게 타오르기도,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오기도 하죠. 불멸의 기술이 기억을 이어준다고 해도, 결국 내가 누구인지는 지금의 선택이 만드는 겁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잔을 기울였다. 칵테일이 금빛 불꽃처럼 흔들리며 내 안의 혼란을 비추는 듯했다. 불꽃이 옮겨 붙을 수는 있지만 그 이후의 타오름은 각자 다르다. 어쩌면 인간의 삶이란, 결국 꺼지기 전까지 자신만의 불꽃을 어떻게 태우느냐에 달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서, 한 가지만 더 묻지."
나는 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럼 만약 로그인 과정에서 실수로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이식하면 그를 어떻게 봐야 하지? 신체적으로는 같지만 기억은 완전히 다른 사람일 텐데."
아서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한 사람의 기억이 달라진 거네요. 처음에는 나를 결정짓는 기준이 무엇으로 결정하는가의 질문이었다면, 이번엔 정체성이 몸에 있는가, 아니면 기억에 있는가의 문제군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누구인지를 정하는 건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그 이후의 행동입니다. 겉모습이 같다고 해서 진짜가 되는 건 아니죠. 기억과 경험, 감정이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그냥 다른 사람일 뿐입니다."
잠시 후, 그는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세상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둘 중 누가 진짜인지 판단할 때, 결국 자신들이 기억하던 모습과 행동만을 보고 진짜를 정합니다. 누가 더 익숙한가, 누가 더 자신들이 아는 모습과 가까운가.. 그게 기준이 되죠."
그는 잔을 천천히 닦으며 낮게 웃었다.
"결국 진짜와 가짜의 경계란 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믿는 사람들에 의해 굳어지는 거고요."
나는 말없이 잔을 내려놓았다. 공허한 술집 공기 속에서,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아득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서는 잔을 닦다 말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도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잠시 생각에 잠긴 나를 바라보며 아서가 말했다.
"이든 본부장님은.. 스스로를 이든 맥스웰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시나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잔을 쥔 손이 미묘하게 떨렸다. 나는 눈을 피하지도, 대답하지도 못했다. 아서는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중요한 건 그거예요. 아리아나양이 당신을 이든 맥스웰로 보고 있다면 당신은 곧 이든 맥스웰인 거고, 그녀가 다른 사람이라고 느낀다면 결국 다른 존재가 되는 거겠죠."
그 말은 이상하게도 술보다 더 깊게 스며들었다. 나는 한참 동안 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비웠다. 나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아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원래의 이든 맥스웰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잠시 잊고 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만약.. 진짜 이든 맥스웰이 돌아온다면?’
그가 지금 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아리아나는 나를 어떻게 볼까. 부하들은? 이 도시는? 진짜가 돌아오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잃는다. 이 집도, 이 이름도, 이 삶도.
머릿속에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첫째, 진짜가 돌아오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난다. 둘째, 진짜가 돌아와도 내 자리를 지킨다. 무엇을 선택해도 내 미래는 밝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진짜와 가짜의 충돌은 결국 한쪽의 소멸을 의미한다. 로그인한 몸이 두 개가 존재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며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전에 도망칠 수도 싸울 수도 아니면 진실을 폭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확실한 희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돌아오는 날, 그것이 곧 나의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적막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오가고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그 화려한 빛조차 내 눈엔 공허하게만 보였다. 나는 발걸음을 늦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
도시는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구두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연인의 낮은 웃음소리, 어딘가에선 날카롭게 전화 통화하는 남자의 목소리까지. 모든 소음이 겹쳐서 흘러들어왔지만, 그 순간 나는 이상한 부재를 감지했다.
아이들의 목소리. 그 소리가 어디에도 없었다. 놀이터에서 울려 퍼질 법한 웃음, 골목에서 뛰노는 발자국,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의 목소리. 언제부터인가 이 도시에선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눈을 떠서 거리를 둘러봤다. 불멸의 도시라 불리는 샤이닝 시티. 하지만 그 화려한 빛 속 어디에도 아이들의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가는 건 항상 어른들뿐이었고 거대한 스크린에 비치는 광고에도 완벽하게 자란 성인들만 있었다. 미래를 상징하는 존재라 할 수 있는 아이는 이곳에서 철저히 지워져 있었다.
그 순간 아리아나의 꿈이 떠올랐다. 낯선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 처음보는 얼굴들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고 했다. 잃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는 이유 없는 두려움과 그리움.
나는 발걸음을 멈춘 채 한동안 그 장면을 떠올렸다. 실제로는 본 적이 없었다는 어린 아이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은 너무도 생생했고 그 느낌이 내 안에도 퍼져왔다.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도시가 잃어버린 어떤 흔적이 꿈으로 새어 나온 것이 아닐까.
불멸이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지워낸 도시는 동시에 탄생도 지워냈다. 죽음이 없으니 새로 태어날 필요도 없었고 새로운 아기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그렇게 인간 사회의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던 시작과 끝이 이어지는 리듬이 끊겼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였지만 실상은 멈춘 시계처럼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시의 밝은 불빛들이 서로 뒤섞여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밤하늘에는 단 하나의 별빛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도시에는 빛이 넘쳐흐르는데도, 정작 원래부터 있어야 할 진짜 빛은 사라져 있었다.
섀도우 시티에 있었을 때는 밤만 되면 하늘 가득 쏟아지는 별들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장벽 너머의 별빛은 언제나 희미했지만, 어둠 속에서 바라본 별은 오히려 더 선명하고 가까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를 묘하게 위로했고 내일을 버틸 작은 희망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 샤이닝 시티의 하늘은 달랐다. 화려한 불빛과 불멸을 광고하는 수많은 빛들이 별빛을 가려버렸다. 빛은 넘쳐나는데, 정작 가장 소중한 빛은 사라진 하늘. 이곳은 모든 게 화려했지만 동시에 별 하나 없는 공허였다.
나는 한참 동안 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어쩐지 섀도우 시티에서 보았던 별빛이 그리워졌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마찬가지로 별빛조차 사라진 이곳에서 나는 끝없는 공허감을 느꼈다. 그녀의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어쩌면 경고일지도 모른다. 불멸이라는 이름으로 감추어진 이 도시의 균열, 잊혀진 기억의 틈에서 흘러나오는 진실의 조각. 그것이 그녀의 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한편, 이터널 프로젝트에 합격한 이들은 잠시 짧은 숙소 생활을 마친 뒤 이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건물 안에서의 시간은 평온했지만 공기 속에는 설명하기 힘든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창문은 있었으나 희미한 안개 같은 필름이 끼워져 있어 바깥 풍경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활 자체는 괜찮은 편이었다. 합격자들끼리 서로 친분을 쌓아갔고 식사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으며 놀이 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아침 정적을 깨고 차례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합격자 전원, 로비로 집합."
군인의 외침에 합격자들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자신의 정보가 적힌 팔찌와 지급된 복장만 걸친 채 로비로 향했다. 그곳에는 버스처럼 보이는 크고 단단한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창문은 두꺼운 방탄유리로 되어 있었고 안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버스 앞에는 이미 합격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군인들이 신분을 확인했고 머리 위로 감시 드론이 일정한 속도로 선회했다. 같이 따라 나왔던 클레리아와 제임스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클레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든 소식... 혹시 들은 거 있어?"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여기서도 안 보이는 걸 보면 결국 불합격된 거겠지."
클레리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설마 그 미로에서 함정에 걸려서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니겠지?"
제임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작게 말했다.
"아마 살아 있을 거야. 이든은 이미 여러 번 참가했는데도 살아남았잖아. 어쩌면 지금쯤 섀도우 시티 어딘가에서 다시 기회를 기다릴지도 몰라.”
"그랬으면 좋겠다..."
클레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버스 쪽으로 돌렸다.
제임스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며 낮게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마치 외부에 우리 존재를 절대 들키면 안 된다는 듯이 움직이고 있어."
그는 버스 주변을 경계하듯 바라봤다. 군인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보였고 간격을 유지한 채 줄을 맞추고 있었다. 감시 드론도 여러 대 계속해서 하늘에서 그들을 감싸듯 천천히 원을 그렸다.
"마치 외부인들이 우리를 보면 안 된다는 듯한 분위기야. 버스 창문도 안에서는 밖이 보이는데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잖아. 우리가 합격자 라기보단, 이송 대상이 된 느낌이야.”
"승차하세요."
검은 유니폼을 입은 군인이 짧게 말했다.
총은 들고 있었지만 등에 멘 상태라 당장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을 가린 검은 헬멧 탓에 그들의 표정은 전혀 알 수 없었다. 합격자들은 차례차례 차에 올랐다. 차 문이 닫히자 안은 조용한 고요와 함께 묘한 압박감을 풍겼다. 날씨도 좋았고 좌석은 편안했지만, 누군가 일부러 소리를 지운 듯 답답한 정적이 감돌았다. 차가 출발하자 합격자들 몇몇은 옆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곧 시선을 돌렸다.
"어디로 가는 걸까?"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고 불필요한 말이 더 불안을 키울 것 같았다.
차는 천천히 샤이닝 시티 내부로 들어왔다. 창밖으로 번쩍이는 초고층 건물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자, 잠시 눌려 있던 불안감 대신 묘한 기대가 다시 살아났다. 끝없이 뻗은 고층 빌딩들, 미끄러지듯 도로 위를 떠다니는 무인 차량들. 그 광경은 한때 광고 화면에서만 보던 영원의 도시 그대로였다. 합격자들 몇 명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래,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잠깐 전까지의 공포와 긴장은 눈앞에 펼쳐진 찬란한 도시 풍경에 녹아드는 듯했다.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드디어 차는 어느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그곳도 거대한 건물이었지만 다른 곳과 분위기가 달랐다. 거대한 방벽과 철문, 위로 솟은 감시탑들, 그리고 문을 열기 전 차체 전체를 스캔하는 보안 게이트까지. 외형만 보면 군사 요새 같았다. 합격자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이터널 플레임 프로젝트의 깊숙한 내부로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차례차례 내린 합격자들은 순서대로 줄을 섰다. 그들을 맞이한 사람들은 검은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얼굴은 헬멧으로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데이터 패드를 들고 연신 기록을 남겼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기초 신체검사를 받게 됩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군인이 차분히 말했다.
"체력, 신경 반응, 면역 상태, 유전자 적합성 등 여러분의 미래를 위한 최종 단계입니다. 모든 절차는 안전하며, 여러분은 곧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합격자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로는 검사였지만 이 건물 전체가 묘하게 차갑고 무거웠다. 차 안보다 더 짙은 침묵이 드리웠다. 합격자들은 안내를 따라 넓은 복도를 지나갔다. 그들은 지하 1층에 마련된 검사 대기실로 이동했다. 벽에 붙은 유리 너머로 사람들이 신체검사를 받는 모습이 보였다. 옷을 갈아입고 차가운 기계에 누워 스캔을 받는 모습, 주사를 맞고 혈액을 뽑히고 머리에 여러 전극을 붙인 채 눈을 감는 모습.
"저.. 이거 다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옆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곧 알게 될 거다."
검정 군복을 입은 군인은 차갑게 말할 뿐이었다.
이때부터 합격자들 중 몇몇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 그리고 이 시설의 공기 자체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천천히 목을 조르는 듯했다.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진정한 영원의 삶인지, 아니면 영원한 그림자의 시작인지.
모든 기초 검사가 끝난 후, 합격자들은 한 줄로 이동용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각자의 팔에는 심장박동과 혈압을 체크하는 기계가 연결되어 있었다.
"곧 마지막 검사가 진행됩니다. 편하게 누워 계세요."
간호사 복장을 한 여성이 부드럽게 말했다.
간호사들은 합격자들의 얼굴에 산소마스크처럼 보이는 장치를 하나씩 씌워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긴 하루 끝에, 그저 마지막 검사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몇 초가 지나자 여기저기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 온몸이 나른해지며 정신이 스르르 잠식됐다. 이를 제임스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역시.. 뭔가 있어."
그는 마스크를 얼굴에 대는 척만 하고 제대로 걸지 않았다. 공기가 살짝 새어나가는 각도를 계산하며 얕게만 숨을 쉬었다. 몇 분 후, 방안은 적막에 잠겼다. 합격자들은 하나둘 눈을 감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제임스는 심장이 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모두 마스크 때문에 잠든 거야.'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아 잠든 척하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곧이어 침대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구원들이 한 명씩 이동용 침대를 밀어, 거대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옮겼다. 제임스는 귀를 기를 기울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하강감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그들은 어느 방으로 옮겨졌다. 모두 자리에 눕혀진 뒤, 연구원들과 군인들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제임스는 실눈을 뜨고 몰래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합격자들 몇몇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곧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가 있는 곳은 숨이 막힐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다. 맞은편 벽이 너무 멀어서 희미하게만 보일 정도였다. 그때 제임스의 시야에 들어온 건 양쪽으로 끝없이 늘어선 수많은 원형 캡슐들이었다. 대부분의 캡슐 안에는 눈을 감은 사람들이 물속에 잠긴 채 누워있었고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미동도 없었다. 제임스는 조심스레 한 캡슐에 다가가 표면에 표시된 글자를 읽었다.
[신체 변환 진행 중... DNA 최적화 단계.]
그는 다른 캡슐의 표시도 확인했다.
[기억 이식 준비 중... 생체 동기화 87%.]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게.. 뭐지? 신체가 변한다니.. DNA를 최적화한다고?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제임스의 머릿속에 혼란과 공포가 동시에 밀려왔다. 그때 누군가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재빨리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 눈을 감고 마치 깊이 잠든 척 숨을 죽였다. 그리고 연구원들이 조용히 다가와 합격자들을 하나씩 빈 캡슐에 옮겨 넣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속으로 그들을 눕히고 투명한 캡슐 문을 닫는 소리가 차례로 울렸다. 제임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저 안에 들어가면 끝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저기에 들어가선 안 된다고 느꼈다. 마침내 한 연구원이 그의 이름을 확인한 뒤, 그를 캡슐에 넣으려 다가왔다. 그 순간, 제임스는 눈을 번쩍 뜨며 번개처럼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옆에 있던 연구원 두 명을 제압하고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 군인 두 명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캡슐 뒤쪽으로 몸을 숨기며 빠르게 출구 쪽으로 향하던 그때, 그 군인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총을 뽑으려는 찰나, 제임스는 먼저 몸을 날렸다. 한 명을 전력으로 밀쳐 넘어뜨리고, 다른 한 명의 팔을 비틀어 제압했다. 그리고 바로 바닥에 쓰러진 군인까지 단숨에 제압한 후에 곧장 출구로 달렸다.
하지만 연구원 중 한 명이 급히 경보 버튼을 눌렀다. 사이렌이 울리고 붉은 조명이 방 안을 뒤덮었다. 출구로 뛰어가던 제임스 앞을, 문 입구 밖에서 대기 중이던 또 다른 군인 한 명이 들어오면서 부딪히며 넘어졌다. 체격이 제임스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근육질의 군인이었다.
제임스는 다시 일어나 출구 쪽으로 달려갔지만 군인이 그를 붙잡아 들어 올린 뒤 바닥에 내던졌다. 그 충격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제임스의 몸을 군인은 곧바로 어깨를 짓눌러 도망칠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임스는 두 발로 군인의 머리를 잡아서 넘어트렸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나서 그의 뒤를 잡은 후 목을 졸라 기절시켰다. 제임스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바로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버튼을 눌렀지만 인식 오류만 표시될 뿐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제임스는 방금 쓰러진 군인을 끌고 와 그의 손목을 인식기에 갖다 댔다. 그러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곧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처음엔 1층 버튼을 누르려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그들은 내가 1층으로 갈 걸 예상하고 대기할지도 몰라!'
제임스는 내부에 있는 버튼들을 보다가 직행 모드라는 버튼을 발견했다.
현재 1층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는 수십 명의 군인들이 총을 겨누며 대기 중이다. 그들은 버튼을 눌러서 멈추길 기다렸지만 엘리베이터는 1층 표시등이 스쳐 지나가는데도 멈추지 않았고 지나치며 올라갔다
"2층이다!"
엘리베이터는 2층에서 멈췄고 군인들이 전력으로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통해 위층으로 달려갔다. 2층은 원래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경보가 울리자 대부분의 인원은 이미 1층으로 내려간 상태였다. 텅 빈 복도에 울리는 건 제임스의 발걸음 소리뿐.
제임스는 눈에 보이는 대로 통로를 따라 무작정 달렸다. 커브를 돌자, 군인 한 명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가 총을 겨누었지만 한순간에 가까워진 제임스는 뛰어들며 무릎으로 그의 안면을 가격했다. 한 번에 제압하고 그대로 달렸지만 뒤에서 군화 소리가 울렸다. 복도의 끝에서 두 명의 군인이 뛰어오고 있었다. 제임스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근처 큰 방으로 몸을 던졌다. 문을 잠그자마자 눈앞에 커다란 유리창이 보였다. 그는 방 안의 의자를 집어 들고 유리창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쾅! 쨍그랑! "
한 번에 깨지진 않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로 가격하자 마침내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밖을 내려다보니 군용 차량 여러 대가 보였다. 하지만 2층 치고는 꽤 높았다. 잠깐의 망설임. 그 사이, 뒤에서 문을 부수려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쿵! 쿵!"
그리고 이어서 문이 부서지며 군인들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제임스는 주저하지 않았다. 곧장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차 위로 세게 떨어지며 큰 소리를 울렸다. 충격이 컸지만 다행히 일어날 수 있었다. 차 안에 있던 군인이 놀라서 뛰어나오자, 제임스는 그대로 그를 제압했다. 그를 운전석 가까이에 데려와서 손목을 인식기에 갖다 대어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바로 운전을 해서 앞에 입구로 보이는 쪽으로 향해 달렸다. 그때, 뒤에서 쏟아져 나온 군인들이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했다. 수 십 명의 군인들의 총알이 도망가는 군용 차량의 뒤를 때리고 있었다. 그 순간,
"사격 중지!"
짧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뒤쪽에서 나타난, 계급이 높아 보이는 장교였다. 그는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멈춰! 저 녀석의 DNA가 필요하다!"
모든 군인들은 사격을 멈췄다. 제임스의 차량은 그 사이 도로 끝으로 달려 나갔다. 경보음이 울리고 게이트가 내려오기 시작했지만, 제임스는 속도를 더 높여 간발의 차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군인들이 달려 나왔지만 이미 차량은 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남은 건 장교의 날카로운 시선뿐이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부하에게 명령했다.
"보안 본부에 연락해라. 합격자 하나가 달아났다고."
제임스는 군용 차량을 몰아 도시 중심부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군용 트럭과 오토바이가 줄지어 쫓아오고 있었고 머리 위에서는 여러 대의 군용 드론이 붉은 탐색광을 켜고 하늘을 가르며 추격했다. 다행히 그들은 쉽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그러나 추격은 점점 더 치열해졌다. 제임스는 운전석에 몸을 붙인 채 숨을 고르며 앞만 바라봤다.
"젠장.. 이렇게 가다간 잡히겠어."
그는 방향을 급히 꺾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광장쪽으로 향했다. 도로 위 전광판과 홀로그램 광고가 쏟아지는 번화가였다. 유리로 된 고층 빌딩 사이로 차를 몰아넣자, 뒤따라오던 군용차들이 급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부딪히지 않으려 아수라장이 됐다. 드론들은 여전히 위에서 날아오며 그를 추적했다. 도심 한복판에 들어서자 제임스는 재빨리 판단했다.
'이 차로는 더 이상 못 간다.'
그는 인도에 있는 대형 전광판 아래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수많은 인파 속으로 몸을 던지듯 섞여 들어갔다. 사람들은 퇴근 시간과 쇼핑으로 붐벼 혼잡한 파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군용 차량들이 번화가에 도착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들은 차를 버리고 사라진 제임스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지만, 민간인들이 너무 많아 섣불리 총을 꺼낼 수도 없었다. 머리 위에서는 군용 드론들이 붉은 스캐너를 켠 채 골목과 인파 위를 샅샅이 훑었다.
제임스는 광고판 불빛 속에서 몸을 낮추고 가게 진열대 옆으로 몸을 숨겼다. 숨을 고르며 드론 한 대가 바로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붉은 탐색광이 그의 머리끝을 스쳐갔지만, 바로 옆에 있던 또 다른 행인에게 포커스가 옮겨가며 드론은 그대로 지나쳤다.
제임스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심의 수많은 불빛과 사람들 속에 묻혀 있어 간신히 추격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깐이었다. 그가 상점 앞을 지나갈 때마다 문 앞의 자동 인식 시스템이 그를 인식하고 있었다.
보안본부 상황실에 붉은 경고등이 연이어 점멸했다. 거대한 홀로그램 지도 위에 경고 표식이 번쩍이며 번화가 중심에 떠올랐다. 한 팀장이 현재 사황을 보고했다.
"현재 도망자의 신원 인증 실패 신호가 계속 발생합니다."
나는 즉시 팀장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팀을 꾸려서 그가 있는 지점부터 여러 방향으로 수색해. 그리고 보안 드론을 그 구역으로 투입해."
"알겠습니다."
잠시 후, 모니터 속 도시가 벌집처럼 깜빡였다. 각 지점마다 배치된 드론의 카메라 화면이 동시에 열렸고 그 화면을 통해 제임스의 움직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거리를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의 모든 시스템이 그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길모퉁이에 세워진 안내 드론이 그의 얼굴을 스캔하더니 전자음이 울렸다.
[삐- 신원확인 불가. 보안본부에 보고합니다.]
제임스는 자신이 추적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그러나 또 다른 골목 안쪽에서 자동 배송 로봇이 멈추더니 같은 경고를 내뱉었다.
[삐- 신원확인 불가...]
그 경고음들은 곧바로 보안본부의 화면에 포착됐다. 지도 위에 붉은 점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곳에 다시 나타났다. 마치 그를 향해 조여 오는 포위망처럼.
"각 팀은 방금 뜬 경고 좌표를 따라 이동해. 사방에서 몰아붙여."
내 지시가 떨어지자, 본부 밖의 보안팀들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 움직였다. 거리 위의 드론 수가 급격히 늘어나며 공기 속에 윙윙거리는 소음이 진해졌다.
제임스는 숨이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뒤에서는 드론이 그림자처럼 쫓아오고 앞에서는 보안 요원들이 조금씩 좁혀오고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마침, 한 남자가 손목 인증을 통해 대형 건물의 게이트를 열고 있었다. 제임스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를 거칠게 밀쳐 게이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자동문이 닫히며 바깥의 붉은 스캐너 불빛이 차단됐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안쪽 로비를 훑었다. 그러나 이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천장 모서리마다 감시 카메라와 센서들이 주위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삐- 신원확인 불가. 보안본부에 보고합니다.]
건물 내부의 보안 시스템도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한편, 나는 모니터 속 제임스의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속 그는 마치 수많은 창살이 없는 감옥 속에서 몸부림치는 동물 같았다. 도시는 그 자체로 거대한 감시망이었다. 도시 곳곳에서 자신만의 임무를 수행 중인 안내 드론들, 공중의 감시 드론, 건물 내부의 감시 카메라. 그 어느 곳 하나 그를 숨겨줄 만한 구석은 없었다.
나는 팔짱을 끼며 그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무전기를 들어 지금 당장 수색을 멈추라고 외칠 수도 있었지만 그럴 명분이 없었다. 보안본부 본부장으로서, 나는 도시의 질서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질서를 깨고라도 구해주고 싶은 누군가가 바로 그 화면 속에 있었다. 제임스는 숨을 헐떡이며 건물의 계단을 뛰어오르는 게 보였다. 붉은 경고 문구가 화면 하단을 가득 메웠다.
[대상: 신원확인 불가. 체포 요망]
나는 눈을 좁히며 화면을 더 가까이 당겼다. 보안팀이 골목과 건물 주변을 에워싸는 모습이 보였다. 곧 그가 잡힐 것이다. 내 머릿속은 계속해서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그는 끝난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나는 지금 본부 안에서 상황을 보고받으며 지시해야 했고 함부로 현장에 개입하는 순간 모든 의심은 나에게로 향할 것이었고 그건 너무나 큰 위험이었다. 모니터 속에서 제임스가 한쪽 복도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뒤를 드론 두 대와 세 명의 무장 요원이 바짝 뒤쫓았다. 내 심장은 그와 함께 달리는 듯 고동쳤다.
"제발.. 버텨라. 조금만 더."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그 말은 그에게 닿을 리 없었다. 그가 잡히면 더 이상 도와줄 방법이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도 그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무력감은 오래전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지금 내 안에서 서서히 부식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래도 제임스는 보안 요원들의 추격을 아슬아슬하게 따돌리며 계속 위층으로 향했다. 바닥이 발 밑에서 울릴 만큼 속도를 높였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거리는 좁혀졌다가 다시 벌어지길 반복했다. 그러다 복도를 질주하던 제임스의 등 뒤로 날 선 기운이 스쳤다. 가장 가까이 붙은 보안 요원이 그의 뒷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그 순간, 보안 요원의 팔에 장착된 패드를 통해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구조 재배치 시스템인 크리렉트 큐브 시스템을 작동시킨 것이다. 그러자 제임스 앞쪽, 텅 빈 복도 중앙에 갑자기 격자무늬가 생기며 출렁거리더니, 정사각형 조각들이 여러 개로 나눠지듯 분리되면서 구조물처럼 빠르게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바닥에서 순식간에 자라나듯 벽이 형성되며 그의 길을 막았다.
"젠장..."
갑자기 생긴 벽에 가로막힌 그는 주변을 훑었다. 그때 마침 바로 옆, 닫혀 있던 문이 찰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순간, 제임스는 그를 거칠게 밀쳐 방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문을 힘껏 닫아 잠갔지만 이걸로 안심하지 않았다. 옆의 소화전에서 소화기를 꺼내 보안해제를 인식하는 장치를 여러 번 쳐내서 망가트렸다. 전자기기에서 스파크가 튀면서 더는 쉽게 열리지 않게 되었다. 잠시 뒤, 문 앞까지 달려온 보안 요원들이 인식 패널에 손을 대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 손상 – 개방 불가]
문에서는 경고음이 들렸다. 하지만 그들은 당황한 기색 없이 한 요원이 바로 큐브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그들을 막고 있던 문 중앙이 역시나 큐브 모양으로 여러 개의 조각으로 나눠지더니 사방으로 빠르게 옆으로 밀어내듯 통로를 만들어낸 후 멈췄다. 그들은 순식간에 그 문을 통과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제임스는 곧장 발코니로 달려갔다. 투명한 대형 창문을 밀어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그는 발코니 밖을 재빨리 살폈다. 양옆과 발아래로 뻗어 있는 건 모두 같은 구조의 발코니였다. 제임스는 난간을 단단히 잡고 몸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내쉰 뒤, 아래층 발코니로 발을 내디뎠다.
바로 그 순간, 위층에서 창가를 확인하던 보안요원들이 있었다. 그들의 시야에 활짝 열린 발코니가 들어왔다. 그들은 밖을 확인했지만 제임스가 정확히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잠시 숨을 고르던 팀장이 두 명의 요원에게 손짓으로 왼쪽 벽과 오른쪽 벽을 번갈아 가리켰다. 곧 옆에 있던 두 요원이 동시에 팔에 있던 패드를 터치했다.
큐브 시스템이 작동하며 양쪽 벽의 일부에서 수십 개의 작은 큐브 블록으로 쪼개지듯 분리됐다. 큐브들은 옆으로 미끄러지듯 밀려나고, 그 자리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사각형의 통로가 생겼다. 첫 번째 요원은 왼쪽 통로로, 두 번째 요원은 오른쪽 통로를 통해 반대편 방으로 들어간 후 수색을 시작했다.
혼자 남은 팀장은 주변을 확인하더니 이번에는 바닥을 향해 장치를 조작했다. 바닥 표면이 여러 개의 큐브로 나눠지며 가장자리로 밀려나며 구멍이 생겼고, 그 아래로 계단이 형성됐다. 그는 곧바로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 도착한 요원은 바깥문이 살짝 열린 것을 발견했다. 문밖으로 나서자, 통로 끝에 있는 화분의 잎사귀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방금 빠르게 지나간 흔적이었다. 그는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도망자는 아래층으로 이동했다. 추격한다."
한편, 건물 밖으로 나가려던 제임스는 복도를 달리다 앞쪽 벽이 큐브 조각들이 형성되면서 늘어나더니 도주로를 막는 것을 보았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어 뒤로 달렸지만, 코너를 돌자마자 보안요원 한 명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곧 몸싸움이 벌어졌고, 그는 요원의 권총을 떨어뜨린 뒤 제압했다.
도망치려던 순간, 앞뒤로 큐브 블록이 또 솟아올라 길을 완전히 봉쇄했다. 갇힌 제임스는 당황했지만 곧바로 방금 제압한 요원의 손목 장치를 떠올렸다. 팔에 달린 장치를 만지작거리자, 방과 붙어있던 벽 일부가 큐브 모양으로 조각나듯 열리며 또 다른 통로가 드러났다. 그는 지체 없이 그 통로로 몸을 날렸고, 곧 벽은 다시 봉합되듯 닫혔다.
벽을 넘어 방으로 들어온 그는 창문 너머로 바깥 상황이 보였다. 위치는 3층. 드론이 공중에서 붉은 탐색광을 비추며 순찰 중이었다. 제임스는 몸을 낮춰 시야를 피하고, 드론이 멀어지자 창문 밖 난간으로 몸을 옮겼다. 바로 아래에는 보안 드론이 있었다. 그 드론은 붉은 탐색광을 번쩍이며 천천히 건물 외벽을 스캔하고 있었다. 제임스는 창문틀에 매달린 채 숨을 고르며 드론의 이동 궤적을 주의 깊게 살폈다. 드론의 광선이 잠시 다른 쪽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는 이를 악물고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그는 창틀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찰나의 순간, 중력은 그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곧장 드론 위로 향해 있었다. 드론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제임스는 양손을 뻗어 드론 본체의 외곽 프레임을 움켜쥐었다. 둔탁한 금속 진동이 팔을 타고 전해졌고, 드론이 예상치 못한 충격에 크게 흔들렸다. 드론은 안정된 자세를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이 드론은 사람을 태울만큼 크지 못했다. 충격을 감지한 드론은 기계음과 함께 경고등이 번쩍였다.
제임스는 몸을 최대한 낮추며 드론이 자신에게 부딪힌 게 무언인지 인식하지 못하도록 계속 위에서 버텼다. 건물 안에서는 보안 요원들이 복도로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론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점점 땅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건물 모퉁이를 돌아 골목 쪽으로 향하자, 제임스는 재빨리 드론을 놓고 인근 간판 위로 몸을 날렸다. 간판이 삐걱이며 흔들렸지만 그는 안전하게 지상으로 내려와 곧바로 좁은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길가에는 계속해서 드론들의 붉은 탐색광이 다시 스쳐 지나갔지만, 그가 사라진 좁은 골목의 깊숙한 어둠까지는 닿지 못했다. 제임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의 위치는 곧 알려질게 뻔하기에 그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보안요원들이 보이지 않자 제임스는 그들을 따돌렸다고 생각했지만 곧 도시 한복판에서는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도시를 벗어나야 해."
갈 곳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자신이 살던 섀도우 시티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하늘 높이 그의 머리 위를 유유히 따라가는 한 대의 드론이 있었다. 고성능 카메라가 제임스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찍고 있었고, 그 영상은 그대로 내 책상 위 홀로그램 화면에 재생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이 도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건 물론 잡히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곧 잡히게 된다.'
그리고 무전기를 들고 현장팀에 명령했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
계속해서 울리는 경고음들이 제임스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나는 개인차를 몰아 경로를 따라가, 그의 위치 반경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 거리의 소음과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뒤섞이고 있었다.
그때, 머리 위를 선회하던 드론이 붉은 탐색광을 깜빡이며 경고 신호를 보냈다. 곧이어 무선이어폰에는 부하요원의 말이 들려왔다.
"대상 발견. 좌표 전송 완료."
나는 즉시 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군중 사이로 시야를 가르며 달리자, 불빛과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고 바로 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제임스!”
그 순간, 마치 등을 찌르는 듯한 시선에 반응하듯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찰나, 제임스의 표정이 굳었다. 직감이 그에게 속삭였을 것이다.
'도망쳐야 한다!'
그는 곧 몸을 돌려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제임스!"
나는 그를 부르며 거친 발걸음으로 뒤쫓았다. 사람들의 어깨를 밀치고 광고 홀로그램의 불빛을 가르며 우리는 번잡한 거리를 가로질렀다. 제임스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질주했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거리, 광고 홀로그램 속 모델들이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 사이로 달리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숨 막히게 거칠었다.
나는 시선을 한 순간도 떼지 않고 그를 쫓았다. 그러나 제임스는 인파가 더 빽빽한 쪽으로 몸을 틀며 일부러 시야를 가렸다. 그는 옆 골목으로 급히 몸을 던졌다. 좁은 골목에는 음식점의 뒷문과 배달 로봇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로봇 한 대가 느릿하게 지나가자, 제임스는 피하지도 않고 바로 뛰어넘었다. 나는 로봇을 밀쳐내며 곧바로 뒤를 쫓았다.
골목은 곧 두 갈래로 갈라졌다. 제임스는 잠시 망설이다 오른쪽으로 뛰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발소리와 그림자를 좇아 곧바로 같은 방향으로 꺾었다.
"멈춰, 제임스! 널 잡으려는 게 아니야!"
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골목 벽에 부딪혔다. 제임스는 뒤를 흘끗 돌아보더니 속도를 더욱 높였다. 그는 차도를 가로질러 달아났고 차량들은 아슬아슬하게 그를 피해 지나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도로 위의 차량들은 회피 기능으로 내 움직임을 미리 감지했기에 간신히 부딫히지는 않았다. 덕분에 무사히 건너편으로 건널 수 있었다.
차도를 먼저 벗어난 제임스는 번쩍이는 간판을 스쳐 지나가며 대형 쇼핑센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쪽의 화려한 조명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그대로 그 뒤를 밟았다. 제임스는 중앙 홀을 가로질러 곧장 계단으로 향했다. 그의 발소리가 계단 위로 사라지는 순간, 나는 보안본부에서 몰래 가지고 나온 큐브 컨트롤 패드로 큐브 시스템을 조작했다. 계단 상단의 일부가 큐브 블록처럼 부서져 나가더니 빠르게 쌓이며 단단한 벽을 형성했다. 제임스는 그 앞에서 멈춰 섰다. 예상치 못한 벽에 길이 막히자 그는 주변을 둘러본 뒤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 순간, 계단 아래에서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제임스! 널 잡으려는 게 아니야. 내 애기 좀 들어봐!"
내가 말했지만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계단을 내려오더니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순식간이었다. 내 팔을 비틀고 어깨를 밀쳐 균형을 잃게 하더니 그대로 나를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차가운 바닥의 감촉과 함께 숨이 턱 막혔다. 제임스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도주했다.
"크윽..."
나는 잠시 충격에 얼어붙어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보안본부의 통신이 귓속에 울렸다.
"도망자는 서쪽으로 이동 중. 섀도우 월 게이트까지 약 10킬로미터."
팔에 장착한 장치의 화면에서는 표시된 붉은 점이 점점 경계선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섀도우 시티로 들어가는 게이트. 그곳은 보안본부의 관할이 아니었다. 그 게이트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으며 그곳에서 잡히게 되면 모든 권한은 군대로 넘어간다. 그 순간부터 나는 제임스를 보호해 줄 수 없었다.
"그전에 잡아야 해."
나는 즉시 내 차를 호출했다. 무인으로 운전해서 달려온 차를 바로 타서 새도우 월 게이트 방향으로 속도를 높였다. 그곳에 도착하자 날카로운 바람과 함께 게이트의 거대한 장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높게 솟은 장벽, 그리고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2인 1조로 철저히 순찰 중이었다. 각각의 모습은 매섭고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어 보였다. 나는 게이트에서 약간 떨어진 위치, 시야가 트인 건물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제임스가 도착할 예상 경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의 기다림 후, 저 멀리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제임스였다. 그의 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시선은 오직 게이트를 향하고 있었다. 표정에는 망설임 대신 결심이 묻어 있었다. 저 게이트를 넘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무모한 시도였다. 군인들은 보안요원들과 달랐다. 잘못하면 제임스는 죽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개입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숨을 죽이며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그가 시도하기 전에 반드시 잡아야 했다. 순찰 중인 군인들의 발걸음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그 틈을 노려, 나는 건물 사이로 몸을 낮추고 제임스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멀리서 보면 마치 그림자가 길게 기어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제임스는 게이트 구조를 훑어보며 잠시 멈췄다. 그의 시선은 군인들이 교대하는 타이밍과 감시탑 등 각도를 계산하는 듯 보였다. 그 표정 속에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그의 도망칠 틈을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침을 꿀꺽 삼키며 두 번째 순찰 조가 돌아서는 순간을 기다렸다. 곧 시야에서 정찰중인 군인들이 보이지 않자 바로 나가서 제임스 쪽으로 달려들었다.
"제임스!"
낮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그에게 닿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우리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눈빛 속에는 놀람보다 본능적인 경계심이 먼저 번쩍였다. 제임스는 즉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뻗어 그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그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어내며 나를 비껴갔다.
"널 잡으려는 게 아니야! 이야기 좀 하자!"
급히 외쳤지만 제임스의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군인들이 아직 눈치채지 못한 채 다른 구역을 순찰하고 있었지만 이 소란이 길어지면 그들의 시선이 곧 이쪽으로 향할 것은 분명했다. 우선 그를 가둬야 했다. 샤이닝 시티와 섀도우 시티를 가로지르는 높다란 장벽, 섀도우 월을 따라 제임스를 뒤쫓았다. 게이트를 제외하면 이 거대한 벽을 넘어갈 방법은 없기에, 다행히도 주변에 군인의 감시는 덜한 편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쫓기만 해서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큐브 시스템을 작동시켜 그의 앞길을 막았다. 하지만 솟아오르는 벽을 제임스는 가속을 붙여 가볍게 뛰어넘었다. 나는 다시 바닥에서 벽을 솟아오르게 하고 섀도우 월 쪽에서도 장벽을 생성해 보았지만, 그는 빠른 스피드와 날렵한 몸놀림으로 벽을 피하거나 넘어서며 계속 도주했다. 그때, 바로 옆 빌딩 골목에서 순찰 중이던 군인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곧장 제임스를 향해 경고했다.
"멈춰!"
그들은 총구를 겨누며 제임스를 멈춰 세웠다. 피할 곳이 없었던 그는 잠시 손을 들며 멈춰 섰다. 그 순간, 나는 골목 입구에 구조물을 세워 군인들이 나오지 못하게 차단했다. 뜻밖의 상황에 제임스는 당황한 듯 잠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다시 도망치려 하자, 나는 재빨리 앞길까지 차단하며 그의 도주로를 완전히 막았다.
"드디어 잡았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지금은 모습이 달라졌지만 나 이든이야, 이든 카터! 클레리아와 같이 있었던 날 기억해?"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이든이라고? 그걸 어떻게 믿지? 그리고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다른 얼굴을 가진 나의 모습 때문에 제임스는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았다.
"다른 모습으로 로그인돼서 그래. 그날 네가 클레리아와 서로 도와준 모습이 보기 좋다고 했었잖아?"
제임스는 진짜 그때의 이든인가 하면서도 혼란스러워했다.
"근데 네가 이든이라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어. 우선 여길 도망치자"
제임스가 잠시 당황한 사이, 막힌 구조물 건너편에서 군용 차량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전방과 후방 모두에서 군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나는 즉시 섀도우 월 쪽으로 큐브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두꺼운 벽 일부가 수십 개의 큐브 블록으로 분리되며 거대한 구멍이 열렸고, 그 너머로 섀도우 시티가 보였다. 제임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통로 속으로 들어섰다.
그는 완전히 통과한 뒤, 잠시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자신을 진심으로 도와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확신과, 동시에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의문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통로가 닫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임스가 급하게 말했다.
"클레리아! 클레리아도 그곳에 있었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벽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앞뒤를 막고 있던 구조물들도 사라지자 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도망자가 사라졌다. 이 근처를 수색해."
그렇게 명령을 내린 뒤, 나는 보안본부로 복귀했다. 클레리아.. 잊고 있었다. 제임스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캡슐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로그인 대상이 되기까지는 신체 변화와 절차에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은, 아직은 구할 기회가 남아 있었다.
지금은 우선 눈앞의 일부터 마무리해야 했다. 제임스가 섀도우 시티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곧 드러날 것이고 그러면 군은 나를 포함해서 반드시 수사에 나설 것이다. 이제 제임스를 위해 내가 직접 해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앞으로는 그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런데 문득 오래된 기억이 스쳤다. 샤이닝 시티로 갔던 아버지가 밤중에 몰래 도망쳐 나왔던 일. 그때 아버지의 표정은 겁과 혼란,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뒤섞여 있었다. 혹시 이번 일이 그때와 비슷한 건 아닐까. 그때 아버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한편, 이 모든 상황을 한 대의 드론을 통해 지켜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꽤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군.."
그는 개인 항공기의 안락한 좌석에 기대어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며 혼잣말을 했다. 그의 시선이 머문 화면 속에는 샤이닝 시티에서 탈출한 한 남자가 섀도우 월을 통과해 섀도우 시티로 사라지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화면 속 인물의 얼굴과 움직임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는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여자 승무원 한 명이 다가오며 한국말로 말했다.
"잠시 후 샤이닝 시티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든 맥스웰님."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잔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빛 속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의 눈빛이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