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트와일라잇 시티] 6화

Chapter 6. 빛의 뒤편, 그림자의 진실

by 이진성

트와일라잇 시티 6화


지구는 더 이상 나라의 개념에 의해 구분되지 않았다. 국경은 오래전에 의미를 잃었고 이제 사람들의 신분을 결정짓는 것은 어느 도시 출신인가였다. 각 도시는 독립된 거대한 국가와도 같았고 그 도시의 절대 권력자는 대통령이 아닌 마스터로 부르며 부대통령 역시 지금은 부마스터로 불린다. 시티 마스터는 도시의 모든 법과 질서를 통제하며 정치·경제·군사·정보를 한 손에 쥔 인물. 그의 한 마디는 곧 절대명령이었고 그 명령을 거스르는 것은 곧 도시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였다.


그리고 시티 마스터의 이름으로 보안본부에 긴급회의 소집 명령이 내려왔다. 명령이 전달되자마자 보안 본부 본부장이자 이터널 플레임 프로젝트 총책임자라는 직분으로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회의가 열리는 그곳은 샤이닝 시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껏 TV 화면이나 뉴스 영상으로만 봤던 그 거대한 황금빛 돔 건물이었는데 그곳으로 직접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다.


가야 하는 건 알지만 마음 한켠이 묘하게 불편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괜찮을까. 혹시 무언가 잘못되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오히려 상황이 불리해질 수도 있었다. 나는 보안 본부를 나와 주차장에 세워둔 차량에 탑승하자마자 시동을 걸고 곧바로 현장을 벗어났다.


차량이 시티 중앙으로 향할수록 하늘 위에서 감시하는 드론이 점차 많아졌고 곧이어 멀리서 거대한 돔 형태의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을 닮은 둥근 실루엣이었다. 샤이닝 시티의 심장이라 불리는 그곳은 솔라곤이라 불리었다. 그리고 그 둥근 돔에서 내뿜는 빛은 멀리서 봐도 압도적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도시 전체를 감싸는 또 하나의 인공 태양 같았다.


입구 근처에는 흰 제복을 입은 정부 관리자들이 지나다녔고 주변을 둘러싼 검은 전투복의 군인들은 일렬로 정렬해 있었다. 그들의 어깨에 걸린 소총은 광택이 날 만큼 관리되어 있었고 검은 헬멧 아래로는 눈빛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입구에 들어가려 하자 드론 한 대가 낮은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전신을 훑는 빛줄기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지나갔고 이내 스캔 완료음이 들렸다.


[이든 맥스웰. 솔라곤 입장 승인]

나는 천천히 입구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모든 바닥과 벽은 흰색의 매끄러운 재질로 덮여있었다. 내 발자국 소리조차도 이곳의 공기 속에서는 금방 삼켜졌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 근처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곧장 내려 회의장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아침 햇살이 흘러내리며 홀 중앙에 놓인 거대한 원탁을 비추고 있었다. 각 자리마다 투명한 태블릿이 놓여 있었고 정부의 고위 인사들과 일부 장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때, 정면의 거대한 의자에서 한 인물이 천천히 일어섰다. 황금빛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은 남자, 시티 마스터였다. 그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오늘 왜 이렇게 긴급히 모였는지는 모두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리고 나는 이곳이 단순한 회의실이 아니라 도시의 운명이 결정되는 심판대라는 것을 직감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마스터는 말을 이었다.

"우리 도시 보안에 매우 심각한 취약점이 발견되었다고 들었다."

그 순간, 회의실 안에 앉아 있던 여러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먼저 말을 꺼낸 건 한 법무행정관이었다. 그는 보고 있던 패드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차갑게 물었다.

"보안 본부장, 당신이 이터널 플레임 프로젝트의 총책임자가 아닌가?"

이어 중장으로 보이는 한 장교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곳에서 도망자가 나왔다는 건 결국 당신 책임이라는 말이겠지."


나도 참지 않았다.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연구소의 현장 관리는 군이 맡고 있지 않습니까? 애초에 탈출 자체를 막았어야 하는 건 군의 몫 아닙니까?"


그러자 그 장교가 비웃듯 말했다.

"보안요원들도 그 잘난 큐브의 힘으로도 잡지 못했다는 걸 다 알고 있습니다. 그 대단한 기술을 그렇게도 못 써먹을 거면, 차라리 우리에게도 권한을 주시죠."

회의는 금세 탈출 사건의 책임에서 큐브 시스템 권한을 군에 이양할 것인가로 주제가 변질됐다.

법무행정관이 내 쪽을 노려보며 덧붙였다.

"보안본부장, 이번에 직접 현장에 나갔다면서? 그런데도 결국 놓쳤다고 하더군. 옛날에도 한번 놓친 적 있지 않나?"


그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아버지 탈출 사건. 그들이 말하는 그때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의 표정에는 명확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보안 본부의 능력이 아주 의심스럽군."

그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책임 소재를 따졌다.

"보안본부는 무슨 일을 한 겁니까? 이렇게 무능할 수가 있다니.."


나도 더는 물러서지 않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씀드리죠. 애초에 군대가 아니라 우리 보안본부가 직접 연구소를 관리했더라면,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순간 회의장 안의 시선이 묘하게 바뀌었다. 군의 잘못을 정면으로 지적한 내 말에 몇몇 장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자 장교가 비집고 들어왔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크리렉트 큐브, 그 힘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장치를 우리 군인들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회의 주제는 큐브가 아닙니다. 이건 다른 안건으로 다루시죠."


잠시의 언쟁 뒤에 시티 마스터가 손을 들어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천천히 테이블 끝에 앉은 에게 향했다.

"이든 맥스웰 본부장, 제임스 탈출 사건과 관련해서 추가로 할 말이 있나?"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뇨. 없습니다. "

시티 마스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회의는 우선 이걸로 마치겠다."


시티 마스터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주변의 보좌관들과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오늘 일어난 사건은 정부 주도하에 철저히 조사할 것이다. 모든 부서는 전면 협조하도록. 그리고 큐브와 관련된 회의도 조만간 공지하겠다."

모두가 퇴장하기 시작했고 나도 서둘서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나를 향한 의심과 불신의 시선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나는 보안 본부로 돌아왔다. 내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복도 끝에서 에이스 팀장인 제이미 그레비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는 나를 보자 인사를 하고 나서 질문을 했다.

"긴급회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분위기는 어땠나요?"

에이든의 목소리는 예의는 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나는 피곤한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군이 모든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려 했어. 게다가 큐브 사용 권한을 자신들에게도 달라고 요구했지."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큐브 연구와 개발의 주도권은 명백히 보안본부에 있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단호했다.

"만약 군이 그걸 손에 넣으면, 도시 안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보안 본부의 존재 이유는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나는 제이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스 팀장의 입에서 다시 들으니 더 무겁게 다가왔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터널 플레임 프로젝트도 오래전에 우리 보안본부에서 지휘하던 사업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이 그 사건을 이유로 개입을 시작하더니, 결국 본부장님을 제외한 모든 인력이 프로젝트에서 배제됐죠."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군이 기술과 프로젝트를 하나씩 잠식해 들어가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이번 탈출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에이스 팀장과의 대화를 마친 후, 나는 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기운이 방 안을 감쌌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누구지?"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천천히 뒤로 돌아보더니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갑군. 이름은… 이든 맥스웰이라고 부르면 되겠지?"

그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진짜였다. 눈앞에 서 있는 건 진짜 이든 맥스웰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당장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싸워야 하나? 그 찰나의 고민이 얼굴에 드러난 걸 눈치챘는지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진정해. 놀랄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가 만나게 될 거라는 건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지만 묘하게 모든 걸 꿰뚫는 힘이 있었다. 그는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걱정할 필요도 없어. 현재 이든 맥스웰이 두 명이라는 사실은 나 말고는 아직 아무도 모르니까."

방 안의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건 단순한 침입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 자체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진짜 이든 맥스웰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아마 궁금하겠지. 왜 지금 너를 잡지 않는 건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이미 왜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시선을 천천히 내게 맞췄다.


"네가 어떻게 나의 정보로 로그인을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이게 도움이 될 거 같아서 너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나는 계속 경계하면서도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졌다.

"너에게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주지. 이건 너도 알고 있어야 해. 왜냐면 너는 이든 맥스웰이니까."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지만 이미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보안 본부는 정부와 군대처럼 큰 영향력을 가진 조직이었지. 하지만 권력은 항상 균형을 싫어했다."

그는 잠시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군대와 정부는 우리와의 작은 마찰을 빌미로, 서서히 군의 힘을 키워나갔고 보안본부의 영향력을 약화시켰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시작은 프로젝트였어. 원래 우리가 주도하던 이터널 플레임 프로젝트에 그들이 개입하기 시작한 거지. 처음엔 막으려고 했지만, 정부와 군대를 상대로 싸운다는 건 곧 목숨을 건다는 뜻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30년 전, 이번 제임스 탈출 사건처럼 그때도 합격자들이 탈출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는 탈출자가 여러 명이었지만, 공식적으로는 1명만 탈출한 것으로 발표됐지."

나는 그 말을 듣자 며칠 전 보안 본부 회의 때 제이미 팀장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계속 말했다.

"정부와 군이 압박하니 우린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군의 힘이 강해져야 국력이 강해지고, 다른 도시와의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프로젝트를 독점해 자신들의 힘을 끝없이 키우려는 거였지."


그는 잠시 나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탁자 표면을 천천히 두드렸다.

"네가 모르는 게 있어.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오래 사는 것에 그치지 않아."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 프로젝트의 본래 목적은 모든 인간이 영생을 누리는 것이었다. 놀라운 재구성능력으로 어떤 상처든 몇 분이면 완전히 회복되고 세포의 노화마저 멈추게 만드는 기술. 결국엔 더 이상 로그인조차 필요 없는, 완전한 존재로 진화시키는 것이 목표였고 실제로 개발에도 성공했지. 사실, 이 과정이 가능했던 건 큐브의 힘 덕분이었다. 그 에너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서야 큐브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무언가 더 거대한 존재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내가 참여해 온 이 프로젝트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큐브의 힘은 DNA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생 말고도 인간의 신체 조건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낸 거지. 뛰어난 DNA 조각들을 계속해서 모아서 조합하다 보면,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DNA가 완성된다. 이 DNA로 로그인한 자는 인간을 초월한 힘과 속도를 가지게 되지."


나는 숨을 삼켰다. 그는 내 표정을 읽은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린 그런 존재를 이터널이라 불렀다. 그리고 정부는 그들을 조금씩 비밀리에 모으고 있어. 지금은 이터널 사령부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어 조용히 세력을 키우고 있지."


나는 궁금해서 말했다.

"그런 엄청난 걸 군이 사용가능하다면 그들이 전부 그 이터널이라는 존재로 변한다는 거야?"

이든 맥스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행인 점은, 만들어진 이터널 DNA는 처음으로 동기화된 사람에게만 반응한다는 거다. 다른 기억을 가진 자가 로그인하려 하면 DNA 자체가 소멸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의 이터널 DNA로는 단 한 명만 만들 수 있어. 왜 그런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이터널은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셈이지."


그는 창밖을 잠시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중요한 건 이거다. 그 힘에 큐브까지 손에 넣는다면? 영생과 힘, 그리고 물질의 구조를 마음대로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능력까지 갖춘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신이 된다. "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걸로 그들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최강의 도시를 만들 거다. 그 과정에서 눈엣가시였던 나는 제거될 거고 보안본부도 군대에 흡수되겠지."


그는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래서 널 지금 당장 구속하지 않는 거다. 넌 나와 동등한 권한을 지니고 있고 다른 요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

나는 그의 시선에서 미묘하게 느껴지는 압박을 견디며 최대한 표정을 숨겼다. 그는 마지막으로 낮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정부와 군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면 너도 제거 대상이 된다. 선택권은 없어. 나와 함께 그들을 막든가 아니면 나와 싸우다 죽든가."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만약 네가 말한 대로 그 엄청난 존재들이 이미 군과 정부에 있다고 치자. 그럼 도대체 어떻게 맞설 생각이지? 네 말로는 그들은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졌다며. 총이 통하긴 하는 거야? 그들도 죽을 수는 있는 건가?"

그는 팔짱을 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 몸싸움으로 이기는 건 말도 안 된다. 절대로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존재들이지. 총알 몇 발 맞는다고 쓰러지지도 않아. 좀비처럼 다시 일어나서 싸운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무거운 현실감이 묻어 있었다.


"그럼 방법이 없다는 거잖아."

"아니, 다행히 뇌를 크게 손상시키면 그들도 죽는다. 실험실에서 이미 확인했지."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들은 연구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은 실험용 쥐처럼 희생시켰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들을 죽인다 해도 그들의 신체 정보가 백업되어 있는 한 무한 로그인도 가능하지. 그래서 프로젝트 연구소를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의 말이 전부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일단 들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질문을 이어갔다.

"그 이터널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해도 뭐가 달라지지? 상대는 군대다. 너와 내가 힘을 합친다 해도 여전히 불리한 건 마찬가지야."

이든 맥스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 말대로다. 군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벌이면 불리할 수밖에 없지."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눈빛은 어딘가 달랐다. 수긍하는 듯하면서도 깊은 속마음 속에 감춰둔 무언가가 있다는 기묘한 기운이 스쳐갔다. 마치 아직 꺼내지 않은 또 다른 패가 있다는 듯이.

그의 시선이 잠시 먼 곳을 향했다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게 있다."

"뭐지?"

"크리렉트 큐브의 진정한 힘."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큐브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주의 힘 그 자체였다."

"우주의 힘? 그게 뭐지?"

"우주에 있는 행성과 은하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나?

"설마.."

"그래. 이 큐브는 단순히 물질의 구조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수준이 아니야. 우주를 이루는 근본적인 구조 자체를 다룰 수 있다는 뜻이지."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는 거야?"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 정도의 힘을 다루려면 큐브를 완전히 해독해야 해. 그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도시 정도의 규모라면 가능하다. 애초에 그 힘으로 샤이닝 시티가 만들어졌으니까."

그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쉽게 말해 지구에 있는 도시 전체를 순식간에 제거하고 다시 만드는 거지. 쓰고 싶지는 않지만 최후의 순간이 온다면... 그 위력은 너도 상상 못 할 만큼 클 거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도시의 구조 자체를 무너뜨린다.. 그건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모든 도시의 역사와 사람들,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지워버린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날카로움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든 맥스웰로서의 권한이 있으면 나 역시 그 힘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걸 사용하는 순간, 내가 지키고 싶은 것까지 전부 사라질지도 모른다. 가슴 깊숙이 묵직한 불안이 내려앉았다. 저건 단 한 번이라도, 그리고 절대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힘이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오며 낮게 웃었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네 자유다. 하지만..."

"곧 정부와 군에서 이번 탈출 사건을 빌미로 압박이 가해질 거다. 내가 말한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는다면 협조하는 편이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둘 다 무사히지 못할 테니까."


그는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그는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나는 방에 홀로 남았다.

진짜 이든 맥스웰은 곧 군대와 정부가 제임스 탈출 사건을 빌미로 프로젝트와 큐브를 완전히 장악하려 할 거라고 했다. 결정을 빨리 내리라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다.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끝에는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으면 그는 더 이상 내가 필요 없는 존재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를 없애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므로 나는 선택을 해야했다. 그의 손을 잡고 함께 싸울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일에서 발을 빼고 도망칠 것인가.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듯했다. 문제는 그 선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그리고 무엇을 잃게 만들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나는 천천히 호텔로 들어갔다. 저택에는 찐자 이든 맥스웰이 들어갔고 둘이 같은 장소에 있으면 우리의 존재가 들키기 때문에 따로 행동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호텔 안은 조용했지만 마치 이 벽과 가구들이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거실 소파에 몸을 묻으며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군대와 정부, 그리고 큐브. 이 모든 것이 제임스라는 한 사람의 탈출로 또다시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자신과 만남을 가진 후 돌아간 원래의 이든 맥스웰. 그는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 어두운 방 안에는 바깥에서의 은은한 빛이 들어올 뿐이었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개인 PC에 낮게 명령을 내렸다.


"옛날 영상 기록을 열어줘. 날짜는... 200년 전, 섀도우 시티에 있던 시절."


잠시 후, 공기 속에 푸른빛이 번지더니 홀로그램이 서서히 펼쳐졌다. 먼저, 석양이 물드는 언덕 위에서 웃고 있는 한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남자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의 이든 맥스웰이었고 그의 곁에서 환하게 웃는 여자는 그가 사랑했던 아내였다. 두 사람은 어깨를 맞대고 장난스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장면이 전환되자 병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고통스러운 숨을 내쉬는 아내,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는 이든 맥스웰. 잠시 뒤,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화면 속 아내는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은 채 기뻐하며 웃고 있었다.


다음 장면은 놀이터였다. 햇살 아래에서 환하게 뛰어노는 작은 소녀. 그녀의 눈동자는 아버지를 꼭 닮아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손을 흔드는 아내, 그리고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이든 맥스웰.

그러나 따뜻한 기억은 오래가지 않았다. 화면은 다시 변했고 짐을 챙긴 이든 맥스웰이 집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그는 어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아빠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돌아올게."

그리고 아내와 마지막으로 입을 맞췄다. 그녀의 눈빛은 불안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는 돌아서야 했다.


화면은 곧 전환되었다. 한 실험실 내부, 이든 맥스웰은 한 동료와 함께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눈앞에는 복잡한 데이터와 유전자 구조가 빼곡히 떠 있었고 그들의 표정에는 성취의 긴장과 환희가 동시에 비쳤다. 그러나 갑작스레 문이 열리며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실험실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군인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 들어온 인물은 부마스터였다.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생 DNA는 이제 정부의 기밀로 분류된다. 시티 마스터의 명령이다."이든 맥스웰과 동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장면은 잡음과 함께 흐릿해지더니, 또 다른 기억으로 바뀌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큰 큐브가 두 사람이 앞에 있는 모습. 이든 맥스웰과 그의 동료는 서로를 마주 보며 손을 멈춘 채 날 선 시선을 주고받았다.


"큐브의 힘을 사용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야. 무고한 사람들까지 전부 죽게 할 수 없어."

이든 맥스웰의 목소리는 낮지만 단호했다.

"너도 알잖아. 희생 없이 세상은 바뀌지 않아."

동료는 이를 악물었다.

"희생을 강요하는 순간, 너도 그들과 다를 게 없어! 네가 만든 세상은 또 다른 감옥일 뿐이야."

맥스웰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곧 차갑게 굳었다.

"너는 샤이닝 시티 출신이라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거다. 진짜 희생이 무엇인지."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큐브는 마치 두 갈림길의 심장처럼 금빛을 뿜어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다시 시간이 지나서 장소는 솔라곤 내부의 회의장이었다. 그곳에서 정부 관계자들과 이든 맥스웰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사건에 대한 면책을 조건으로, 이터널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행정 및 감독 권한은 총책임자인 이든 맥스웰을 제외하고 전면적으로 정부 관할로 이관한다. 다만 큐브에 대한 연구와 실질적인 운영은 기존과 동일하게 보안본부가 계속 담당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홀로그램은 그 순간에서 멈췄다. 방 안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이든 맥스웰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오래 전의 얼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 남긴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틀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다. 정부와 군을 상대로 싸울 건지, 아니면 이든 맥스웰과 맞붙을 건지. 혹은, 모든 것을 버리고 끝없이 도망칠 것인지. 머릿속에서 수십 번 생각해봤지만 어느 쪽을 택해도 결말은 쓰디쓸 것 같았다.


큐브의 진정한 힘이 그의 말대로 진짜라면 군과 맞서서 이길 가능성은 있었다. 그 힘은 단순한 공격이나 방어를 넘어, 도시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반란에 가까웠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 순간 나는 반역자라는 낙인과 함께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이다.


도망가는 길도 떠올려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부와 군은 나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군과 정부가 연합해 내린 수배령은 섀도우 시티뿐 아니라 샤이닝 시티 전역, 심지어 그 너머의 도시들까지 퍼질 것이다. 그때는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게 된다. 이 모든 걸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마치 커다란 미로 속에서 어느 쪽으로 가도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었다. 가슴속에서는 답답함이 돌덩이처럼 뭉쳐,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방 안에 계속 앉아있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잠시라도 공기와 빛을 느끼며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멀리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어디로 향할지 정하지도 않은 채, 발길이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향했다.


이럴 땐 술뿐이었다. 쓸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자주 가던 바에 들어가 한 잔의 칵테일 내 안의 혼란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혀주길 바라면서.


바의 문을 열자 은은한 조명이 나를 감쌌다. 낯익은 잔향과 함께 무겁지 않은 음악 선율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긴 바 테이블 너머, 잔을 닦고 있던 아서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이든님."

그는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나는 바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칵테일 하나. '마르티네즈'로."

"네."


아서가 능숙하게 병과 셰이커를 잡아 칵테일을 만들었다. 붉은 액체가 잔에 담기고 오렌지 껍질이 그 위에 얹혔다. 나는 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쓴맛과 달콤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낮게 말했다.


"진짜가 돌아왔어."

아서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러나 놀란 기색은 없었다.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의 눈빛에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 목소리에는 쓰디쓴 체념이 묻어 있었다.

"그가 돌아왔고 더 이상 내가 있을 자리는 없어졌어. 모든 일이 잘 끝난다 해도, 내가 여기 계속 있을 수 있을까? 아마 진짜는 그걸 원치 않을 거야."

아서는 잔을 천천히 닦으며 계속 이야기를 들었다.

"게다가.. 원래 내 모습은 사라져 버렸어. 다시는 돌아갈 수도 없어.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됐어."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손에 쥔 잔을 오래 바라봤다. 얼음이 녹아내리며 천천히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내 존재가 흐릿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자리는 잠시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순 있습니다. 다만.. 이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거죠."

아서가 잔을 천천히 돌리며 천천히 말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정해진 자리를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바텐더로만 머물러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은 결국 스스로 만들어가는 겁니다. 남이 빼앗을 수 있는 건 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의지하며 지켜낸다고 믿었던 환상일 뿐이죠."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든님은 지금까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온 게 아닙니다. 그저 이든 맥스웰이라는 이름과 자리를 자기 것처럼 지키기 위해 살아온 것이죠."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는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계속 살아간다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진짜 맥스웰일 테고, 당신은 단지 그의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가게 되겠죠."


내 손에 쥔 잔이 조금 떨렸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그의 그림자란 소리군."

아서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계속 그림자로 살라는 법은 없죠. 그림자는 늘 본체가 있어야만 존재하지만 이든님은 이미 스스로 움직이고 선택해 온 존재예요. 그동안의 결정과 행동이 쌓여서, 이제는 독립된 실체가 된 겁니다."


나는 마시던 칵테일을 바라보며 아서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이제 더는 남의 뒤에 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본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될 수도 있죠. 그건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서는 눈길을 돌려 잔잔히 덧붙였다.

"이제 선택의 순간이 온 겁니다. 계속 다른 사람의 빛에 기대어 그림자 속에 머무를 건지, 아니면 스스로 빛을 내며, 진짜 자신으로 살아갈 건지를요."


나는 잔을 바라보았다. 얼음이 반쯤 녹아 술빛은 흐릿해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 속에서 내 모습이 비쳤다. 흐릿하고 불안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스스로 빛을 낸다..."

그 말은 나에게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다가왔다. 나는 처음으로 로그인된 이후로 지금껏 다른 사람의 삶을 흉내 내며 살아왔고, 그것을 내 삶이라 믿으려 했다. 하지만 아서의 말처럼 그건 결국 그림자일 뿐이었다. 만약 내가 스스로의 빛을 낸다면 나는 누구일까? 이든 카터인가, 아니면.. 이름조차 없는 또 다른 존재인가?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은 혼란만이 밀려왔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더 이상 도망칠 수는 없다는 것.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세상은 나를 그냥 그림자로 기억할 것이다. 나는 잔을 비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젠가 답을 내야겠지. 그 답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간에."


아서가 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는 낮게 말했다.

"한 가지 알려줄 게 있습니다."

나는 눈을 들며 그를 바라봤다.

"뭐지?"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아까 이든님이 오시기 전에, 아리아나 양이 다녀갔습니다. 그녀가 오늘 이든님을 만나고 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맞췄다.

"요즘 만날 때마다 다른 사람 같다고 했습니다. 똑같은 얼굴인데, 예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진다고요."

내 심장이 미묘하게 쿵 하고 내려앉았다.

"무슨 말이지?"

아서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미 사람들은 당신과 돌아온 그를 같은 인물로 보지 않는 겁니다. 그녀조차도요. 세상은 겉모습보다 행동에서 차이를 느끼니까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결국 이든님은 지금까지 단순히 그림자처럼 흉내만 내고 있던 게 아닙니다. 이미 본인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겁니다. 돌아온 그와는 다른 사람으로."

나는 말없이 잔을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니까, 이미 난 나대로의 무언가를 만들어버렸다는 건가."

아서가 잔잔히 미소 지었다.

"맞습니다. 진짜가 돌아온 순간에도, 아무도 당신을 그와 똑같다고 보지 않았다는 건 이미 자신이 나만의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죠."






호텔로 돌아오는 길, 내 몸은 미약하게 흔들렸지만 머릿속은 고요하지 않았다. 아서의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당신은 이미 본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정말 그럴까? 내가 지금껏 살아온 건 단순히 흉내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진짜가 돌아오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리아나가 느꼈다는 다른 무언가, 아서가 말한 이미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그 말은 나조차 인정하지 못했던 사실을 꺼내놓은 듯했다.


내가 남의 그림자 속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나만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너져버린 지금, 나는 어떤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그 질문은 내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치 답을 재촉하듯.


나는 다시 눈을 뜨고 하늘을 보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진짜 이든 맥스웰은 돌아왔다. 그는 원래의 삶으로 복귀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만들어온 이 삶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결국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선택을 내릴 용기가 없었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복도를 지나 방문을 열었을 때, 방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창가에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진짜 이든 맥스웰. 그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아직은 무사하군."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내가 무슨 일을 당했을까 봐 걱정하는 느낌이군."


겉으로는 담담했지만 내 눈빛은 그의 미소 뒤에 숨은 의도를 파헤치려는 듯 흔들림 없이 그를 붙잡았다. 그는 짧은 숨을 고르며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정부가 나에 대해 의심을 시작한 것 같다. 아마 조사 과정에서 내가 없는 동안 로그인된 기록을 발견했겠지. 어쩌면 이미 너의 존재를 눈치챘을 수도 있어."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그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며 말했다.

"내일 아침 정부와 회의가 있어. 제임스의 탈출 사건과 큐브에 대한 압박이 분명 들어오겠지. 물론, 우리 사이에 대해 떠보려는 것도 빠지지 않을 거다."

"내일 회의는 네가 참석해라."

그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되돌릴 수 없는 명령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내가? 왜지?"

내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잠시 웃음을 흘리더니, 곧 차갑게 말했다.

"만일을 대비하는 거다. 정부가 정말로 네 존재를 눈치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만약 그들이 알아챘다면, 넌 곧바로 구금될 거다. 내일 회의에는 모든 대장들이 참석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게 진짜라면 그들이 모인 곳에서는 아무리 나라도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오기 힘들 수도 있지."


그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내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날이 될지도 몰랐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야. 상황이 나빠지면 기회를 봐서 개입하겠다. 그때 널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묘한 시험의 기운이 섞여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봤다.

그는 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기억해라. 우리의 기술이 그들 손에 들어가면 모든 게 끝난다. 너와 나는 사라지는 건 물론, 섀도우 시티는 평생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다."


그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는 방 안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리고 곧 문이 닫히는 소리만이 남았다. 나는 홀로 남겨진 방 안에서, 그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심장을 조여 오는 족쇄처럼.


밤인데도 샤이닝 시티는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빌딩 숲 사이로 수많은 불빛들이 켜져 있었고, 마치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빛은 화려했지만, 동시에 차갑게 느껴졌다. 이든 카터는 시선을 멀리 돌렸다. 저 어둠 너머, 섀도우 시티가 있어야 할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곳은 어두움에 삼켜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존재조차 없는 듯, 마치 애초에 그 자리에 도시가 없었던 것처럼. 그의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빛과 어둠, 존재와 부재. 그 경계에 서 있다는 사실이 이든 카터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이든 맥스웰은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며 섀도우 월에 다가섰다. 그리고 모두의 눈을 피하면서 그 장벽에 통로를 만들어서 넘어섰다. 오래된 돌길을 따라가자, 어둠 속에 고요히 누워 있는 섀도우 시티의 공동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은 스산하게 불어와 낙엽을 흩날렸고 빛바랜 묘비들이 침묵 속에 줄지어 서 있었다.

그는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 묘지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이윽고 한 묘비 앞에서 멈춰 섰다. 차가운 돌에 새겨진 두 개의 이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아내, 에밀리아 맥스웰

사랑하는 딸, 로라 맥스웰


맥스웰은 묘비 앞에 서서 긴 침묵에 잠겼다. 사랑했던 아내와 어린 딸의 이름 앞에서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지만 눈빛은 쉽게 감추지 못하는 흔들림을 담고 있었다.


그는 묘비에 손을 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떨군 채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바로 옆에 놓인 묘비가 잠시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곳에는 또 다른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로즈 카터 여기에 잠들다.


그의 눈빛에 잠깐 미묘한 빛이 스쳤지만 곧 무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지나가며 묘비 위로 낙엽 몇 장이 흩날렸다. 이든 맥스웰은 다시 묵묵히 샤이닝 시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며 그곳은 다시 깊은 어둠 속에 잠겼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