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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게바라 Mar 24. 2022

1월 6일  목 _ 2022년

철 지난 <the Devil’s Advocate(1997)>을 본 이유는

<파우스트>가 생각이 나서입니다. <파우스트>를 다 읽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몇 번이고 시도는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이야기가 늘 흥미로웠는데... 요 근래 그 이야기가 다시 확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파우스트'가 생각이 났습니다.

물론 준비는 꽤나 오랫동안 해왔더랬습니다.

그러던 차에 해가 바뀌는 시간 사이에 저는 '그것'을 가볍게 툭 해버렸습니다. 마치 씹던 껌을 책상 밑에 붙여놓듯이.

그것을 해버리고 났더니 불현듯 ‘파우스트’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해버린 그것은 바로...... 이 영화 ‘알 파치노’ 입을 빌리면

Vanity, Definitely my favorite sin.

이 영화에서 죄라 규정한 ‘허영’을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허영’이란 것이 버리기가 지독히도 어렵습니다. 여기 키아누 리브스도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고야 겨우 버릴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실은 ‘허영’을 죄라고 딱 잘라 규정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인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 긍정적 측면이 훨씬 강하죠.

욕망.

그 욕망이 우리 인간을 지구 위 최상위 포식자로 올라서게 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란 녀석은 만족을 모르죠. 그 욕망이 어느 정도 선을 넘는 순간 알 파치노가 말한 ‘Vanity’ 즉 ‘Sin’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파우스트'에서는 욕망을 다른 면을 보여주는데요,

더 이상 욕망을 향해 갈구하지 않고 방황을 멈추는 순간에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에게 영혼이 먹히고 맙니다.      

다시 말해 ‘욕망’은 그 적정 수위를 유지해야 넘쳐도 모자라도 바로 악마에게 영혼을 잡아먹히게 되는 겁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김으로 제자리에 돌아갈 수 있었던 키아누 리브스의 옆에는 여전히 ‘알 파치노’가 다른 얼굴을 하고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하다는 것은 매일매일 다른 의미로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악마가 자신을 집어삼켜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공모전’에 당선이 되어 저예산 영화를 찍게 된 동시에 ‘드라마’ 건으로 계약까지 한 지인이 가게를 찾았습니다.

저는 기뻤습니다. 참 잘 되었다 생각했습니다. 함께 술자리를 하며 축하해주다가 부러워지고, 이내 나는 왜 지인처럼 행동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이 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버렸는데, 분명 버렸는데, 버린 지 며칠 되었다고 주머니를 들춰보니 아직 ‘욕망’의 부스러기가 한 움큼이나 남아있는 것입니다.

오늘 또 탈탈 털어냅니다.

아니, 매일매일 탈털 털어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철 지난  ‘데블스 에드버킷’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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